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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Sep 19. 2022

'번아웃 증후군' 증상이 보일 때

투머치 업무 강도 + 투롱 재택근무. 밥 먹는 것조차 귀찮은 요즘.

매일 아침 8시 이불을 대충 옆으로 구겨놓고 열 걸음 내에 있는 거실로 출근한다. 끊임없는 back-to-back 화상 미팅과 폭풍같이 밀려오는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고 곧 잘 시간이 된다.


같은 환경에서 홀로 일을 하다 보면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잊힌 채 지내기 쉽다. 한때는 요리하는 과정이 나에게 힐링 시간이었다면, 이제 요리를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곤부터 몰려온다. 결국 요리는 단숨에 포기하고 지친 몸을 이끌어, 먹다 남은 음식 몇 가지를 줍줍해 입 속에 구겨 넣는다.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힐링 타임이 그저 또 한 가지의 귀찮은 잡일이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인식하기 힘든 감정이다. 넓은 범위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또한 번아웃 인식을 위해서는 자신의 정신 건강 상태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를 위해선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이 필수다.


일단 내 현재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요즘 부쩍 주어진 업무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아무리 소소하고 쉬운 일이라도 바보 같은 실수를 내는 경우가 최근에 있었고, 그저 일을 하기 싫어서 계속 버티고 미루다가 데드라인 직전에 벼락 치기를 하다가 큰 코를 다친 적도 있었다. 근무 시간이 아닐 때도 (물론 이제는 정해진 8-to-5 근무시간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주 무기력함을 느끼고 세상의 모든 것을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번아웃에 대해 고민하고 찾아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 있다. 현재 나는 하나의 팀에 속해있지 않고 다양한 stakeholder 들과 일하기 때문에, 항상 여기저기서 (처음 만나는 사람까지 포함한) 새로운 요청이 들어온다. 그 순간 내 회사 노트북과 개인 핸드폰에서 동시에 알림 소리가 울린다. 그 무서운 '띠링' 소리가 내 귀를 날카롭게 찌르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이번엔 또 무슨 요청일까, 어떤 일이 터진 걸까...'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며 떨리는 손끝으로 이메일을 체크한다.


번아웃의 정의를 인터넷에 찾아보다 보니 번아웃을 측정할 수 있는 'MBI (Maslach Burnout Inventory)'라는 목록이 있었다. MBI 테스트는 에너지 부족, 직업에 대한 부정적 감정, 직장에서 능률의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번아웃 여부를 판단한다. 과학적으로 번아웃에 해당하려면 이 세 가지 영역에서 모두 부정적 점수가 나와야 한다.


따라서 '번아웃이 왔다'는 '피곤하다'나 '스트레스를 받는다'와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넘어서서 의욕과 동기를 상실하고, 자존감도 저하되며, 모든 일에 냉소적으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다면 번아웃을 겪고 있을 경우가 높다. 명확한 시작과 끝을 즉시 알아볼 수 있는 감정들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시작되는 증상들로 번아웃이 측정되기 때문에 더욱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며칠 전 회사 상사가 나에게 추가 업무가 주어질 거라는 연락이 왔었다. 안 그래도 끝이 안 보이는 업무량에 이미 잔뜩 화가 나있던 상태였던지 나도 모르게 소심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내 'bandwidth'가 꽉 차서 더 이상의 업무를 받는다 해도 좋은 퀄리티의 아웃풋을 보장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나는 정색하며 상사에게 말했다.


사실 업무 강도만 따졌을 때 현재 업무량이 이상하게 많은 것도 아닐 거다. 특히 내가 일하고 있는 컨설팅 업계에서는 워라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내가 택한 길이니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만, 현재 내 번아웃의 진짜 원인은 장기화된 재택근무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이 든다.


워낙 게으른 편인 사람으로서, 사실 재택근무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막상 회사로 매일 출근하라는 강요를 받았다면, 매일 아침에 준비 시간까지 감안해 일찍 일어나야 하는 부분에 불만을 토로할게 뻔하다. 하지만 벌써 2년의 재택근무. 하루에 12시간 이상 동안 한자리에 앉아 같은 모니터만 보고 있는 일상을 되돌아본 후 내게 남는 건 한숨뿐이다.


만약  사무실에 출근을 했더라면, 업무 시간이 똑같이 길더라도 그 긴 시간에 동료들과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며 사람과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은 있지 않는가. 최소한 내가 모니터에 있는 누구의 프로필 사진만 보면서 오로지 업무 이야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지 않는가.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 소중한 20대를 이렇게 혼자 집에서 보내는 나 자신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저번 글에서는 '콰이어트 퀴팅'이라는 유행 트렌드에 대해 썼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콰이어트 퀴팅' 상태를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콰이어트 퀴팅도 현실적으로 가능할 때만 참가할 수 있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주어진 업무 자체가 양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과연 콰이어트 퀴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일과 삶의 경계선이 없어진 재택근무 때문에 밤 10시에도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이 오는 상사를 맞이한 경우에 콰이어트 퀴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번아웃을 극복하는 과정의 첫 번째 발걸음은 자신의 증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현재 정신 건강 상태를 진단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회사에 업무 강도에 대한 내 고민을 알리는 것일 거다. 앞으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요청이 또다시 들어온다면, 나는 소심하고 감정이 섞인 표현 대신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정확한 입장을 표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나 자신을 돌보는 습관을 기르는 게 최고의 솔루션일거다. 잘 먹기, 충분한 수분 섭취, 꾸준한 운동, 그리고 규칙적이고 임팩트 있는 수면.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좋은 힐링이 없을 것 같다. 연말에 큰 맘먹고 장기 휴가를 내서 한국에 가서 가족들과 보낼 귀중한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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