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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오도라 Aug 30. 2024

실리콘밸리에서 한국, 엘에이, 그리고 시카고로 가기까지

일 년 동안 글 안 쓰다가 갑자기 새벽에 써서 올리는 글

정말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쓴다. 너무나도 정신없었던 지난 일 년간 나는 좋아하는 볼펜으로 백지 한 장에 글씨를 마구 휘날려버리며 감정을 쏟아내는 방법을 애용했다. 전 세계 그 어디를 가도 나와 함께 따라다니는 나의 작은 일기장은 서서히 너덜거리기 시작했고, 그 허물어져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조금 더 정돈된 느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한번 일기장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글자들을 다시 한번 필터에 거르며 스스로의 삶을 한 번 더 되돌아볼 수 있기에.




새해가 된 후부터 지금까지, 사실 길을 잃었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하는지... 아무리 시간을 갖고 머리를 쥐어 싸매도 깔끔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 연차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용서가 되는 신입이 아니었고, 자유롭게 커리어 탐험을 할 시기도 아니었다. 일과 회사에 대한 만족도를 떠나서, 커리어적인 부담감과 의문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기간이었다.


충분한 휴식과 함께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큰맘 먹고 휴가를 한 달 통째로 낸 채 한국에 갔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한국에 있는 몇 군데 회사들과 인터뷰를 해봤다. 오퍼를 받고 나서 잠시 고민도 했지만, 쉽지 않은 결정이었기에 다시 원래 다니던 회사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실리콘밸리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첫 번째 변수가 생긴다. 마침 회사 내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기회가 있었고, 그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는 LA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새로운 팀원들과 새로운 일, 그리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니! 내가 간절히 원했던 삶에서의 '변화'의 기회가 포착되었고, 이 경험을 통해 마치 다른 회사로 이직한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이렇게 나는 새로운 동네인 얼바인으로 이사를 오기로 결정을 한다.


얼바인에 정착하자마자 오랫동안 찾지 못했던 생기가 돌아왔다. 우선 이곳은 안전하고, 깨끗하고, 따뜻했다. 예쁜 카페들과 맛있는 한국음식도 많았다 (나는 진지하게 진정한 한식 파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이 옷을 멋지게 챙겨 입은 모습들이 마음에 들었고 (내가 살던 실리콘밸리 동네는... 노코멘트하겠다),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인종, 직업, 성격들이 실리콘밸리에 비해서 훨씬 다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딩, AI, 일, 연봉'을 둘러썬 대화가 아닌, '예술, 문화, 삶'에 대한 대화들이 오갔다.


엘에이 지역에 살아보기로 결정한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더 장기적으로 이 동네에 살고 싶은 마음에 바로 아파트 계약을 진행했고, 얼마나 이곳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던지, 부모님께도 전화를 걸어 얼른 미국에 다시 나와 이 동네에서 같이 살자고 난리법석을 피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안정적인 삶을 꿈꾸던 찰나, 또 다른 변수가 생긴다. 갑작스레 지원했던 MBA 프로그램에 갑작스레 붙는다. 아무리 내가 즉흥적인 성향을 갖고 있고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편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나는 올해 9월부터 MBA 과정을 시작한다. 현재 회사에서의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회사와 학교를 병행할 예정이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어른'이 되었다. 일상과 회사와 여행을 통해, 살면서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고, 그동안 멀리 살아서 오랫동안 못 봤던 친구들과 더 끈끈한 우정을 쌓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셀 수 없이 많은 이사를 했고, 렌터카를 빌리고 반납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젠 공항에 있는 렌터카 회사 직원들이 나를 기억하고 알아본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오로지 '실리콘밸리 버블' 속에서 지내던 나에게 2024년은 세상을 보는 시야와 내 삶의 경험치를 확장시키는 한 해였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는 않았다. 여러 번의 고비와 실수와 후회의 순간들은 나의 부족함을 인지시켰고, 매번 스스로의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지켜내려 발악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올해의 모든 경험들은 하나씩 다 스스로 선택하고 추진시켰다는 부분이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기 대신, 극도의 불편함을 추구하며 낯선 상황에 나 홀로 한번 툭 떨어뜨려 놓아 볼까?라는 결정을 내렸던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다.


앞으로 2년간 대학원생-직장인으로 살아가며 나에게 찾아올 무궁무진할 변화들은 나의 심장을 미치듯이 뛰게 한다.


지난 일 년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의 옆자리를 (수많은 한숨들과 함께) 묵묵히 지켜주었던 그 모든 소중한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몰래) 전하며. Thank you, tru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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