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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언니의 말맛 Feb 05. 2022

#02. 웃기네, 별꼴이야, 등신.

13살, 시커먼 연탄이 원망스러웠어.


초등학교 6학년. 아빠의 희생으로 우리 집이란 게 처음 생겼다. 그보다 더 어릴 적에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다. 아빠가 오면 우리는 부자가 되는 줄 알았던 시절. 하루빨리 아빠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랬다. 힘들게 해외에서 일하고 돌아오신 아빠 덕분에 8동 2층 8가구가 사는 빌라가 생겼다. 형제들 모두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초등학교 시절 키가 일찍 컸는지 또래보다 성숙했고 앉은 키도 커서 늘 뒷자리였다. 순진했던 나는 늘 엄마의 일을 자주 도와주는 착한 막내딸이었다. 평소와 같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집안일을 알아서 찾아 여우같이 해내곤 했다.



겨울이면 보일러실의 연탄불이 꺼질까 늘 노심초사였던 엄마를 도와 연탄 갈기도 일찍 감치 배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연탄 4장 정도는 들 수 있었다. 집이 2층 끝에 있어서 항상 연탄을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가야 했다. 빌라 입구 옆 연탄을 넣어두는 공간에서 시커먼 연탄을 꺼내야 했다. 이날 역시 몸을 움츠려 연탄을 꺼내고 있었다. 솔직히 누가 보는 사람은 없는지 주의를 살피는 일이 더 큰 몫이었다. 연탄이 귀했던 시절이라 연탄을 도둑맞을 수도 있기에 늘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럽게 연탄 4장을 꺼내 철통에 담으려는 순간 우리 집 빌라동으로 낯선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그 사람이 너무 커 보였다. 우리 빌라동에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서웠지만 자연스럽게 천천히 연탄을 옮겨 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낯선 남자는 우리 집 입구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어린 맘에 긴장했는지 한 속으로 20까지 세면서 시간을 끌었다.


"이젠 그 사람도 집에 들어갔겠지?"생각하고 무거운 연탄 통을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들었고 자동반사로 왼쪽 팔은 중심을 잡기 위해 옆으로 뻗었다.



2층 계단을 오르는 순간 1층과 2층 계단 사이에 그 낯선 느낌을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그 낯선 남자는 계단을 내려왔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와 스치는 순간, 오른쪽 가슴을 꽉 쥐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연탄 통 손잡이를 놓쳤다. 철통이 우당탕탕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부딪쳤다. 나는 차렷 자세로 얼음이 되고 말았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고 당황한 나머지 아무 소리도 못 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계단 아래 흙길이 펼쳐져 있었다. 이건 아니라는 직감과 뭔가 잘못됐다는 판단이 있었는지 블랙 카펫을 밟고 입구를 향해 뛰어 나갔다. 그놈은 빌라동을 벗어나는 코너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가고 있었다.



"야. 이 나쁜 새끼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놈은 나를 향해 돌아보며 소름 끼치게 웃었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놈이 없어지니 눈물이 났다. 억울했다. 나는 주섬주섬 쪼개진 연탄을 담아 2층으로 올라갔다.



기분이 굉장히 불쾌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무 일 없듯 행동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처럼 느껴지는 더러운 기분 때문에 더욱 아무 일 없듯 행동했다. 나만 조용히 넘어가면, 세상도 조용해질 거라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며 더더욱 아무 일 없듯 행동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연탄을 가지러 내려가지 않았다.

지금은 너무나 훌륭한 상담사도 있고, 다양한 센터들까지 있는 세상이다 보니 부러울 때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안에 상처들은 풀어내지 않으면 나쁜 기억에게 질질 끌려다녀야 한다. 무겁고 싫은데 잊히지도 않는 기억들... 얼마 전 심리센터 플로린 님 블로그 글을 통해 어린 시절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하니 속이 시원하다. 개비스콘 10개는 먹은 거 같다. 좋은 기억만 가지고 살기도 바쁜데 나쁜 기억들까지 가지고 갈 필요는 없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지만 상처를 받아 나를 보듬어줘야 한다면 상담 센터 내방도 한 가지 방법이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행범아, 행범아, 추행범 놈아. 그땐 내가 어려서 뒤통수에 "나쁜 새끼야!"라고 최선을 다해 외쳤지만, 지금은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냥 널 용서할게. 너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 너를 용서한다. 너도 얼마나 못났으면 그랬겠니......







[심리상담: 플로린 님의 블로그]https://m.blog.naver.com/florin8993/222635582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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