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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Jan 31. 2023

인생의 보드라운 시기

알렉산드르 도브젠코의 대지를 보고

#그해 겨울, 오렐리앙에게 삶은 부드러웠다.
<꿀벌 키우는 사람>, 막상스 페르민







내 인생에 보드라운 시기가 있었던가.



하굣길 컵떡볶이를 손에 들고 불량식품이 나오는 오락기 앞을 서성이던 그 시절이었을까.

대학 합격 후 이제 나도 성인이 되었다며 어설픈 화장을 하고 늦게까지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시절이었을까.

취업 성공 문자에 공부하던 독서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던 그 순간이었을까.

스페인 알리칸테에서 늦은 산책을 하며 밤의 지중해를 바라보던 그 8개월의 시간이었을까.


많은 순간들이 스치듯 떠오르지만 무엇을 하나 고르기가 참 어렵다. 행복했던 기억은 항상 잠시 뿐이었고 그 뒤에는 또 다른 일들이 항상 펼쳐지는 것이 인생의 진리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유년 시절의 첫 기억은 도로도 채 깔리지 않은 시골 외갓집 툇마루에서의 여름이다. 4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모부가 몰던 자전거 앞 바구니에 앉아 모래가 흩날리는 여름의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흥얼거리는 이모부의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바람이 내 볼을 가르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전거에서 내려서는 툇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었다. 마루에는 증조할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다. 마루에는 매미 소리만 울렸다. 나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따로 차려드린 밥상에서 먼저 수저를 들며 먹자라고 말씀하시면 그제야 식구들이 모두 수저를 들었다. 평생을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으셨던 할아버지가 수박을 먹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셨던 것이 기억난다. 나도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웃었다. 내가 건넨 수박을 한 입 베어 문 할아버지가 다시 웃으셨다. 날 보는 할아버지의 미소가 따스하고 보드라워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배가 간지러워진다.


 이상하리 만치 나는 어린 시절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머리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간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장면과 할아버지의 표정만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그때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할아버지와의 기억을 떠올린 바로 그날, 우연히 알렉산드르 도브젠코 (Aleksandr Dovzhenko)의 ‘대지’라는 오래된 무성영화를 보았다. 자신이 경작하던 농장에 죽음을 앞둔 시몬이라는 노인이 죽음을 기다리며 누워 있고 그 주위를 가족이 둘러싸고 있다. 걱정스레 시몬을 쳐다보는 가족들과 달리 죽음을 기다리는 시몬은 즐거워 보인다. 누워있던 시몬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던 배를 먹는다. 그런 시몬을 바라보며 어린아이도 같은 배를 먹고 있다. 시몬과 아기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곧 시몬은 예언한 대로 행복한 표정으로 죽음에 이른다. 영화 속에 할아버지와 내 모습이 겹쳤다. 할아버지께도 그 순간이 보드라운 장면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하늘나라에서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보드라운 기억으로 말이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부드러운 시절은 과거로 끝나지 않았다. 그 말랑하고 보드라운 기억들이 모여 내 인생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할아버지 곁으로 가게 된다면 내 기억 속의 순간들을 꺼내 보이며 자랑하고 싶다. 영화 속의 시몬을 보며 할아버지를 떠올렸다고 내 삶을 지탱하는 기억 속에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꼭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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