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조 원으로 시간을 산 빅테크와 시간이 없는 전통 플랫폼
2026년 1월 1일, 실리콘밸리의 AI 시장은 조용히 전쟁 중이다. 지난 한 달 동안 AI 스타트업 인수를 위해 42조 원이 움직였다.
엔비디아가 AI 칩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록(Groq)을 29조 원에 인수했고, AI21 랩스를 4조 원 규모로 인수하기 위한 최종 협상에 들어갔다.
메타는 AI 에이전트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 마누스(Manus)를 2.9조 원에 인수했다.
소프트뱅크는 디지털브릿지(DigitalBridge)를 5.7조 원에 인수하며 AI 인프라 경쟁의 문을 열었다.
그 외에도 빅베어 AI(Bigbear.ai)가 군사·안보 AI 영역 확보를 위해 3,600억 원에 Ask Sage를 인수했다.
자체 개발하면 최소 3년은 걸릴 기술을 당장 손에 넣어 경쟁자를 제거하고 우위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빅테크들이 AI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돈으로 사고 있는 것이다. AI 산업이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플랫폼들은 자신도 모르게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이제 AI는 검색만 대체하는 게 아니라, 거래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그록은 AI 추론 칩 분야에서 독보적인 LPU(Language Processing Unit)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이다. 초당 2,500만 토큰을 처리하며, 이는 엔비디아 H100 GPU 대비 약 10배 빠른 속도다. 그록의 칩은 전력 소모가 낮고 대규모 언어 모델 추론에 최적화됐다.
이런 그록은 엔비디아의 강한 경쟁자였다. OpenAI, Anthropic, Meta 등 주요 AI 기업들이 그록의 칩을 테스트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엔비디아의 GPU를 대체할 가능성도 검토했다. 엔비디아는 AI 칩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했고, 독점 규제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이지만 경쟁자를 키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엔비디아는 돈을 주고 경쟁자를 샀다. 29조 원은 거액이지만, 엔비디아 시총의 약 0.6%에 불과하다. 이 돈으로 향후 3~5년 간의 AI 칩 주도권을 확보한 것이다. 그록의 엔지니어 팀을 영입하고, LPU 기술을 자사 GPU에 통합하며 잠재적 경쟁 구도를 원천 차단했다. 그리고 그록을 실제로 인수하지는 않고 껍데기만 남겨두면서 독점 리스크도 헷지했다. 미래를 싸게 산 딜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마누스는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AI 스타트업이다. 중국계 창업 팀이며, 창업 1년 만에 글로벌 기업 500곳을 고객으로 확보했다. 기업 당 평균 구독료는 월 10만 원, 개인용은 2만 원이다. 수백만 명의 누적 사용자를 보유했는데 이중 상당수가 유료 사용자로 이뤄져 있다.
마누스가 제공하는 건 대화형 AI가 아니다. 일을 대신 처리하는 AI 에이전트다. 사용자가 "내일 오후 3시에 앱개발팀과 신규 프로젝트 스펙 리뷰 회의 잡아줘"라고 말하면 마누스는 캘린더를 열고, 참석자를 리스트업하여 일정을 확인하고, 회의실을 예약하고 초대장을 보낸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록을 정리하고, 액션 아이템을 생성하며 마감일을 설정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수초 이내에 완료된다. 사람이 하면 2시간 걸릴 일도 30초면 끝내는 것이다.
마누스의 강점은 멀티앱 연동 능력이다. 구글 캘린더, Slack, Notion, Trello, Zoom 등 30개 이상의 앱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며 API 없이도 UI를 조작할 수 있는 자동화 레이어를 갖췄다. 이는 OpenAI의 GPT-4o나 구글의 Gemini로는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대화는 잘 하지만 실행은 못하기 때문이다. 마누스는 실행에 특화됐다.
메타는 이 기술을 WhatsApp과 Instagram에 통합할 계획이다. 2026년 하반기부터 WhatsApp 사용자 20억 명은 대화창에서 '파리행 항공권 검색'이라고 입력하면, AI 에이전트가 날짜·가격·항공사를 비교하고 최적의 옵션을 제시하며 한 번의 클릭으로 예약까지 완료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는 '검은색 가죽 자켓'을 검색하면 AI가 사용자의 과거 구매 이력·사이즈·스타일 선호를 분석해 3개 브랜드를 추천해주고 바로 결제 링크까지 생성할 것이다.
이게 메타가 2.9조 원을 지불한 이유다. 사용자들이 대화를 하고 상품 구매 전 영감을 얻기 위해 탐색하는 Searching 단계 목적의 앱 내에서 거래까지 완결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사용자는 더 이상 커머스나 여행 앱을 열지 않아도 된다. 검색·비교·결제 과정을 한 사이클에서 모두 처리하기 때문이다.
소프트뱅크의 디지털브릿지 인수는 AI 인프라 전쟁의 신호탄이다. 디지털브릿지는 데이터센터 및 통신 인프라 자산에 투자하는 회사로, 북미·유럽·아시아에 걸쳐 약 7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한다. AI 모델을 학습하고 배포하려면 물리적 인프라가 필수다. GPU만으로는 안 되고, 전력·냉각·네트워크가 갖춰진 데이터센터가 있어야 한다.
소프트뱅크는 이미 Arm(반도체 설계)과 OpenAI(AI 모델)에 투자했지만 인프라 레이어는 없었다. 디지털브릿지를 인수하며 이 빈칸을 채운 것이다. 2026년부터 소프트뱅크는 Arm 기반 AI칩을 설계하고, 디지털브릿지 데이터센터에서 학습시키며, OpenAI와 협력해 배포하는 수직 통합 포트폴리오를 완성한다.
엔비디아의 AI21 랩스 인수 협상은 인재 확보 경쟁의 연장선이다. AI21 랩스는 이스라엘 기반의 생성형 AI 스타트업으로, GPT-3 수준의 언어 모델을 개발했다. 엔비디아는 칩만 파는 회사를 넘어서 AI 소프트웨어까지 제공하는 회사로 진화하려 한다. AI21 랩스의 인재를 영입하면 자체 언어 모델을 개발해 OpenAI, Anthropic과 경쟁할 수 있다.
빅베어 AI의 Ask Sage 인수는 군사·안보 AI 시장을 겨냥한 것이다. Ask Sage는 FedRAMP 및 DoD 인증을 보유한 AI 플랫폼으로, 미국 정부 사용자 10만 명 이상을 확보했다. 이는 민간 시장과 별개로 정부 계약 중심의 사업을 구축하려는 전략이다.
2025년 12월의 AI 인수 러시는 시간을 사려는 전쟁이다. 빅테크는 자체 개발로 수년이 걸릴 기술을 현금으로 당장 확보했다. 엔비디아는 그록으로 추론 칩 경쟁 구도를, 메타는 마누스로 AI 에이전트 생태계를, 소프트뱅크는 디지털브릿지로 인프라 레이어 포트폴리오를 각각 손에 넣었다.
이 전략은 효율적이다. 엔비디아는 시총의 0.4%인 29조 원으로 AI 칩 시장의 독점 리스크를 회피하고 차세대 기술까지 선점했다. 메타에게 2.9조 원은 시총의 0.1%에 불과하지만 이번 투자를 통해 향후 3년 간 확보할 수 있는 시장 점유율은 20%p 이상으로 추정된다. 소프트뱅크는 AI 수직 통합 포트폴리오를 완성했다.
한편, 전통적인 커머스는 시간을 뺏기는 쪽에 섰다. 쿠팡이나 배달의 민족 같은 서비스는 여전히 사용자가 앱을 열고, 검색하고, 비교하고, 결제하는 구조에 의존한다. 카테고리에 따라 다른 앱을 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매일 이용하는 SNS에서 AI 에이전트가 검색부터 비교탐색, 결제까지 모두 대신 해주는 서비스가 익숙해지고 고도화된다면 다른 앱을 켤 생각이 안 들 것이다.
커머스 같은 전통 플랫폼의 경쟁력은 검색 알고리즘과 결제 인프라다. 사용자가 원하는 상품을 빠르게 찾아주고, 안전하게 결제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AI 에이전트는 이 두 가지 모두 더 잘한다.
첫째, 검색 정확도가 높다. 전통 플랫폼은 키워드 기반 검색을 이용한다. '제주도 호텔'을 검색하면 수많은 결과가 나오고, 사용자가 필터를 걸어 좁혀야 한다. AI 에이전트는 '제주도 3박4일, 예산 50만 원, 바다 뷰, 조식 포함'과 같은 조건의 최적 상품을 즉시 제시한다. 무엇보다도 탐색 과정에서 사용하는 SNS에 AI 에이전트가 붙게 되면 검색할 필요가 사라질 수 있다. 릴스를 넘기다 마음에 든 숙소가 있으면 다른 앱을 켤 필요 없이 즉시 구매하는 것이다.
둘째, 결제가 통합된다. 전통 플랫폼은 앱마다 별도 결제를 요구한다. 옷을 사려면 무신사, 배달을 시키려면 쿠팡이츠 등 다른 앱을 열어서 결제해야 한다. WhatsApp AI 에이전트는 하나의 대화창에서 모든 결제를 처리한다. 옷, 음식을 메타페이로 일괄 결제한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3개 앱을 열 필요가 없다.
셋째, 거래 수수료 구조가 바뀐다. 전통 플랫폼은 거래 당 8~15% 수수료를 받는다. 메타는 AI 에이전트 구독료를 받고, 거래 수수료는 2~4%로 낮춘다. 판매자 입장에서 메타가 더 유리하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가격이 더 저렴해진다. 전통 플랫폼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전통 플랫폼이 살아남으려면 두가지 전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첫째, AI 에이전트 생태계에 편입된다.
AI 에이전트가 우리 플랫폼의 API를 호출하도록 계약을 맺는 것이다. 사용자는 인스타그램에서 거래하지만, 백엔드는 우리 서비스가 처리한다. 수수료는 낮아지지만 트래픽은 유지된다. 플랫폼에서 인프라로 전환하는 전략이다.
둘째, 자체 AI 에이전트를 개발한다.
독자적인 AI 에이전트를 만들어 사용자가 앱 없이도 거래할 수 있게 한다. 문제는 개발 비용과 시간이다. 마누스 수준의 AI 에이전트를 자체 개발하려면 최소 3년, 수백~수천 억 원이 필요하다. 그 사이 다른 에이전트가 시장을 점유하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혹은 인수 대상이 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독립 플랫폼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며 생존을 택하는 것이다.
빅테크는 시간을 돈으로 사고 있다. 엔비디아는 29조 원으로 AI 칩 경쟁의 5년을, 메타는 2.9조 원으로 AI 에이전트 시장의 3년을, 그리고 소프트뱅크는 5.7조 원으로 인프라 포트폴리오를 각각 확보했다.
전통 플랫폼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AI 에이전트 생태계에 편입될 것인가, 자체 개발로 3년을 쓸 것인가, 아니면 인수 대상이 될 것인가. 시간은 많지 않다. 앞으로 사용자가 켤 앱은 점점 줄어든다. 대화창에서 모든 거래가 끝나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움직인 42조 원은 시간을 가진 자가 시장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 플랫폼은 시간이 없다. 2026년은 AI가 검색을 대체하는 해가 아니라, 거래를 대체하는 해다. 준비되지 않은 플랫폼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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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 이미지 출처: Unsplash의Cash Macan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