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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Jun 30. 2024

시험지

2024.06.30

2024.06.26


학부 때 인턴을 하던 중의 일이다.


대표님께서 이사회와의 회의를 앞두고 한 현안에 대한 메모가 필요하셔서 팀장님에게 부탁을 하셨고, 일손이 부족했는지 팀장님은 메모 작성을 직접 부탁하셨다.


"그럼 이건 언제까지 보내드리면 될까요?"라고 묻자, 친절하지만 매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Wrong question."


대표님이 이사회 회의에서 곧 논의하실 안건이니, 최대한 빨리 작성해서 전달하는 게 정답이었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몇 달 전, 한 단체와 오찬 세미나를 공동으로 주최했다.


행사 준비와 함께 회의록 작성을 맡게 되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담당자분에게 확인차 여쭸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지만, 혹시 데드라인이 있을까요?"


"네, 끝내시는 대로 바로 보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그리고서는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일을 더 해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너무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일단 완성해서 끝내는 게 중요할 때가 많더라고요. 잘 부탁드려요."


오랜 실무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이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곧바로 회의록을 작성해서 퇴근하기 전에 보내드렸다.




거의 10년을 몸담았던 단체에서 보고서의 최종 검수를 여러 번 맡았다.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는 책의 초판에도 오탈자가 발견되니, 전문적인 훈련을 전혀 받지 못한 편집자가 검토를 했을 때 오류가 수두룩하게 발생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더욱 본질적으로 보면,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완전무결한 결과물이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원고를 영원히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보고서 출간회에서 인쇄본을 배포하기 위해서는 인쇄소에 원고를 미리 보내야 하고, 언론에 보도자료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완성된 PDF 파일을 사전에 보내드려야 한다.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널리 알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니, 일단 보고서를 완성해서 공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핵심적인 내용의 객관성과 정확성을 보장할 수 있다면 나중에 인쇄본을 읽다가 오탈자를 발견하는 부끄러움은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한 수학 선생님께서 시험 시간이 끝나갈 때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여러분, 시험지는 제출해야 채점을 받을 수 있어요. 혹시 다 못 풀었더라도 분명 최선을 다 했을 테니 시험지는 꼭 주고 가세요. 그럼 다음 시간에 봐요."


수학 문제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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