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2
“공작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유엔 인권이사회가 있는 제네바의 팔레 데 나시옹 주위를 걷다 보면 이 문구가 적힌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맞다. 여느 유럽의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비둘기’가 아닌 ‘공작’이라고 쓰여 있다.
1997년에 일본의 한 동물원에서 유엔 제네바 사무국에 공작을 기증했고, 이 공작들은 팔레 데 나시옹을 둘러싼 아리아나 공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팔레 데 나시옹 E관 1층에는 카페 ‘바 서펀트‘가 있다. 유엔 인권이사회 정기회의가 열리는 중에 각국의 외교관과 시민단체 대표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다.
정기 회의 중에는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결의안이 논의되고, 각종 현안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한 여러 부대 행사(side event)가 개최된다.
지난 목요일, 동료들과 함께 다음날 열릴 북한인권 부대 행사 사전 준비 미팅을 앞두고 바 서펀트에서 기다리던 중에 창문 밖으로 공작을 처음 목격했다.
몽블랑과 레만 호수가 빚어내는 우아한 풍경 속에 유유히 거니는 공작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풍경의 경이로움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논의 사이의 괴리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유엔 인권이사회도 뉴욕에 위치한 안전보장이사회 못지않게 인류의 가장 어두운 참상을 다룬다. 폭력, 고문, 차별, 억압 등 무겁지 않은 주제가 없다.
바 서펀트에, 그리고 팔레 데 나시옹의 여러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간절한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칠 수 없는 의문이 있다. 고요하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 알프스의 호숫가에서 오가는 많은 말들이 과연 지금도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권유린의 피해자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예전에 이론물리를 전공하는 분한테서 “문과는 결국 다 말장난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소 심한 지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비판은 아니다. 말이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진실을 감추거나 그로부터 도망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탁상공론에 허비되는 시간과 감언이설에 속아서 피해를 본 사람들을 생각하면, 잘못된 말의 파괴력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말은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세상을 만들어간다. 국제 인권 활동의 근간이 되는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도 결국은 ‘말’이고, 인도주의의 기초인 제네바 협약도 마찬가지다.
말로 인해서 인식이 바뀌고, 말로 인해서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으로 이어진다. 말에 담긴 신념과 사상의 기반이 없이 행동하면 그 어떤 노력이라도 방향을 잃기 마련이다. 의미 있는 변화는 반드시 말에서 시작된다.
진실된 말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