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마추어 May 08. 2024

상처만 남은 사춘기

부모가 나를 안 믿으면 누가 나를 믿나요

금쪽이 기질은 어디 안갔다. 장녀로 태어나 부모에 기대 속에 살았다. 작은 시골 동네다 보니 꽤 똘똘했던 나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고,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자랑하고 싶어 했다. 엄마는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한 큰 딸이었고, 남자 형제들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외삼촌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이뤄내는 데 성공했다. 엄마는 그런 형제들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형제자매 자녀들 중 내 딸이 제일 잘났으면 하는 무언의 욕구가 있었던 것 같다. 엄마의 복잡했던 감정들은 고스란히 어린 나에게로 투영됐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미친듯이 맞섰고,꽤 센 사춘기를 맞이했다.


 기대만 주고 믿음은 없던 나날들

엄마의 기대는 나를 참 힘들게 옥죘다. 초등학교 입학한 이후, 1부터 100까지 쓰지 않으면 밥을 안 주고 방안에 가뒀다. 문이 잠긴 방 안에서 울면서 홀로 숫자를 써 내려갔던 기억이 또렷하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동생은 밖에서 하하 호호 밥을 먹고 있고 나는 혼자 잠긴 방 안에서 울면서 숫자 100까지 쓰고 있었다. 참 서러웠고, 정제되지 않은 분노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엄마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만들기 위한 요구는 대부분 강압적이었고, 그때마다 충돌이 생겼다.


그때마다 끄적인 어린 시절 일기장은 아무도 못 보게 자물쇠 하나 채워두고 "내가 잘해야지, 내가 나쁜 애라서 그런 거야. 내가 없어지면 우리 가족은 행복할까 등" 청승맞은 멘트와 쏟아내지 못한 어린아이의 분노, 그리고 나를 깎아내리는 자기 비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엄마한테 발견된 내 일기장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자연스럽게 일기를 쓰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높은 경쟁률을 뚫고 방송부도 들어갈 정도로 열정적인 마음으로 생활했지만, 정체기였던 듯하다. 시험 기간 때마다 어김없이 내 방문은 잠겼고, 자유란 없었다. 나름 필사의 노력을 하는데도 내가 머물러있는 시험 등수는 전교 30위권이었다. 계속 지쳐가는 와중에 교우관계도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집에 맘 맞는 친구들을 데려가면 엄마는 뒤돌아서 하나같이 욕했다. 그게 참 싫었다. 친한 친구 중 같이 놀면서도 성적 관리 잘하는 친구는 엄마가 참 예뻐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엄마의 입에서 종종 나를 깎아내리게 만드는 비교의 대상이 되곤 했다.


"아니.... 이게 이럴 일인가..."  

억울한 마음은 커졌고 점차 다른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늘려나갔다. 나는 학우를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는 일에는 관심도, 관계조차 없는 그저 친구랑 노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다. 당연히 학교의 문제아 축에도 끼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할 말은 곧 죽어도 해야 하는 금쪽이 같은 성질이 우리 집에선 눈엣가시였을 거다.  


당시 전화기만 잡으면 그렇게 외할머니한테 내 욕을 해댔다. 어느 날은 뜬금없이 뵐 일조차 없던 교장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훈화말씀을 하셨다. 교직에 계셨던 이모할아버지가 나서서 내가 다니는 중학교 교장 선생님께 훈계 좀 하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렇게 이유 없이 교장실에 불려 가서 묵념을 하다가 돌아왔다. 이게 이럴 일인가.....내가 마음속으로 수없이 곱씹던 말이었다.


엄마, 나 좀 믿어줘

나를 믿지 못하는 엄마에게 나도 마음을 점점 닫아갔다.


중3 때 담임선생님이 이유 없는 학생 체벌로 3번이나 신고당한 선생님이었는데도, 엄마는 내 말은 도통 믿지를 않았다. 그 당시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선생님이 폭행으로 신고당한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선생님의 전적은 화려했다. 그리고 사랑의 매라는 미명 하에 가해진 폭력은 담임을 맡았던 우리 반에서도 계속됐다. 나는 앞에 있는 친구와 자리를 몰래 바꿨다는 이유로 교탁에서 사물함까지 뒤로 백하면서 싸대기를 맞았다. 두툼한 손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5분 정도 정신없이 맞으니 뺨이 불타오르더라. 그 와중에 들었던 생각이 잊혀지지 않는다. 바꾼 건 내 잘못이 맞지만, 이럴 일인가.... 억울해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또 다른 한 친구는 조용히 공부 잘하는 친구였다. 그날 뭐가 화가 났는지 석유난로 빈통을 가지고 그 아이를 그렇게 두들겨 팼다. 심기에 거슬렸기 때문이렸다.


그리고 어느 날은 갑자기 반 전체 모두 책상에 올라가라고 했다. 나는 여중을 나왔기 때문에 모두 교복 치마를 입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자, 선생님은 차례대로 우리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납작한 나무봉으로 가격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16살 어린 여학생들의 다리는 피멍이 들었다. 종아리에 멍든 거 보면 우리 반인지 알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한참 동안 시퍼런 다리로 다녔다.


이 얘기를 엄마한테 말해봤지만, 매번 "니가 잘못하니까 당연히 선생님이 때렸겠지" 이 반응뿐이었다.나름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엄마는 외면은 더 나를 엇나가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엄마는 참 서툴렀다.

난 그냥 부모의 믿음을 원했는데, 엄마는 그 정도 여유도 없었나 보다.


더 심해진 나의 사춘기, 그렇게 나의 첫 일탈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비 오는 날 저수지에서 온 가족에게 먼지 나게 맞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집안의 금쪽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