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안에서
감정은 결국 우리에게 변별의 순간을 알려주는 신호일까?
괘씸함, 부끄러움, 미안함, 분노, 화, 짜증, 섭섭함, 슬픔, 증오 같은 감정들은 대체로 부정적 생각과 연결된다.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행동하지 않겠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감정이 주체가 되어버리고, 감정이 주체가 된 세상은 다른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닫힌 세상 속에서는 반복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감정을 넘어서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은 다른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으며, 감정을 닫아버릴 힘을 가진다. 감정을 무한한 존재로 두지 말고, 유한성을 가진 하나의 신호로 인지해야 한다.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며,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그 옆자리에 가치가 주체로 자리한다.
가치는 곧 나다. 감정과 나란히 앉아 나를 끌어주는 힘, 그것이 가치다. 가치를 표현하고 언어화하는 과정은 자기 성찰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에게 인정받으려 애쓰고 있는가? 그로 인해 감정이 상했는가? 이런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유형으로 감정에 반응한다.
목표지향형, 도파민 중심형은 뚜렷한 목적을 완수해야 만족한다. 승리하면 기쁨, 패하면 불만족. 예측이 빗나가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싫어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공감력이다. 다른 입장을 이해하는 힘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만약"이라는 가능성의 언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럴 수도 있다면?"이라는 질문은 닫힌 세계를 열어준다.
닫힌 세계 속에도 보물이 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속에서 믿음이 자라고, 나침판이 되어준다. 자신감이 약해질 때 "만약"과 손을 잡으면, 그 손은 희망으로 인도한다. 존중의 태도 역시 감정과 가치의 균형에서 나온다. 존중이 사라질 때는 권위와 자유의 힘이 과도하게 커졌을 때다. 그때는 올바른 의지가 아니라 감정의지로만 움직인다.
그러나 올바른 자유의지는 감정 옆에 공감, 책임, 나눔이라는 가치가 함께할 때 윤리적인 ‘나’로 공존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집안에 아버지, 어머니, 아들, 그리고 함께 사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이 떨리고 힘이 빠져 식사 때마다 접시와 숟가락을 자주 떨어뜨렸다. 식사 시간이 길어지자 아버지는 불편함과 짜증을 느꼈고, 결국 할아버지를 구석에 앉혀 나무 접시로 혼자 식사하게 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가 물었다. "무엇을 만들고 있니?" 아들은 대답했다. "아빠가 나중에 할아버지처럼 손이 떨릴 때 쓰실 접시예요." 그 순간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시 할아버지를 식탁으로 모셔 유리 접시로 함께 식사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단순하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꼈지만, 아빠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편리함만 추구했다. 결국 자신도 늙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세계를 닫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열린 가능성의 세계를 본다면, "나도 싫은 일을 상대가 좋아할 리 없다"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감정은 닫힌 세계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가치가 옆에 있을 때, 감정은 유한한 신호로 머물고, 우리는 열린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그 세계에서 공감과 책임, 나눔이 함께할 때, 삶은 나를 지탱하고 끌어가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