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을 잘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예전 사명인 '블루홀'이나 <크래프톤>이라는 회사만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거라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다들 주식투자에 열심이신 만큼, "작년 8월 10일 상장한 크래프톤이라는 '종목'이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을 만들어서 파는데 그게 이익을 잘 낸다더라"정도로만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실테죠. 사실 회사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투자하는 사람들은 잘 없으니까요. 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18년 초 즈음 배틀그라운드 출시 초기에 친구들과 PC방에 가서 플레이 해 보려 노력해봤습니다만, 다수가 각자도생으로 전투를 벌여 최후의 1인만 살아남는 '배틀로얄' 류의 게임은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플레이 방식의 게임이었습니다. 저 또한 게임에 오래 흥미를 갖지 못하는 성격인 터라 몇 번 플레이 해 보고 '아 이런 게임이 있구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크래프톤의 사운을 바꾼 배틀그라운드_(현재는 PUBG : BATTLE GROUNDS로 게임명 변경)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크래프톤>의 상장 즈음이었습니다. 현재 기준으로 볼 때 공모가(498,000원/1주)대비 주가가 많이 흘러내리면서 '실패한 공모주'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긴 했지만(물론 공모가 기준 고평가 논란이 있긴 했었죠), 최근의 실적 관련 이슈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까지 15년의 역사를 통해 한국 게임업계 시가총액 1위의 회사로 거듭난 크래프톤의 저력은 무시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크래프톤의 주가차트 흐름
메타버스니, NFT니 게임업을 중심으로 이와 관련한 이슈들이 증가하고 있던 즈음, 게임업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게임 회사들에서는 어떠한 의사결정을 통해 제작과 투자가 이뤄지는지 궁금증을 갖던 차에 이 책 <크래프톤 웨이 : 배틀그라운드 신화를 만든 10년의 도전>과 마주했고, 소설과도 같은 흡인력 있는 서술 방식으로 인해 지루할 틈 없이 크래프톤의 이야기들을 읽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창사이후 10년 간의 이야기들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크래프톤 회사 차원에서 저자에게 경영진의 거의 모든 이메일 열람권한과 직원들과의 인터뷰 기회들을 제공해 줬다고 하니 그래서 이야기가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책을 읽으며,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해서 들었던 생각은, '도대체 이 회사는 언제 성공하지?', '이 고구마같은 전개를 해소시켜 줄 배틀그라운드는 대체 언제 나오는거지?'였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2007년, 크래프톤의 전신인 <블루홀>의 창업에서부터 2017년 말, 이 회사의 운명을 바꾼 <배틀그라운드>의 출시에 이르기까지의 크래프톤은 그야말로 고난과 역경의 역사로 점철된 회사로 보입니다. 물론 그 기간 중에 'TERA'와 같은 게임의 작은 성공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투입자본(4년간 400억) 대비 성과가 좋지는 못했던 관계로 온전한 성공이라 표현하긴 힘들겠지요. 누군가 이 책 크래프톤 웨이는 경영진과 제작진의 10년 간의 <난중일기>에 가깝다고 표현했다는데, 정확한 비유인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살펴본 배틀그라운드 출시 전까지의 크래프톤 내부는 그야말로 전쟁터와 같았으니까요.
이 책을 간략히 뼈대만 대충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제작진과 경영진이 의기투합하여 '제작자를 위한 게임회사'를 만들었지만 이상과 달리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그들의 예상과 실적은 번번이 빗나갔다. 회사 내부에서도 직원들이 이탈하고 경영 지속을 위한 현금흐름이 막히던 와중에도, '블루홀 연합군'이라 칭하며 가능성 있는 여러 회사들을 블루홀의 계열로 편입시켰고, 그 중 <지노게임즈> 출신의 비범한 인재 김창한(현 크래프톤 대표이사)이 역작 <배틀그라운드>를 탄생시켜 회사의 재무적 어려움들을 일소시켰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렸다.
배틀그라운드 출시 전후로 <크래프톤>의 성장세를 표현한다면 대략 아래와 유사한 형태라 볼 수 있겠습니다. 잘 만든 게임 <배틀그라운드> 한 방이 강력해도 너무나 강력했던 것이죠.
배틀그라운드 출시 전, 출시 후의 크래프톤의 성장세는 대충 이런 흐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창업을 하더라도 소위 '존버'를 하며 이런 저런 시도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김창한과 같이 혜성처럼 나타난 훌륭한 누군가의 주도로 성공의 시간은 온다? 그건 아닐 것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로또식 성공 공식을 설파하고자 크래프톤 차원에서 이 책의 출간을 지원한 것은 아니겠죠.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 이러한 성공의 결실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달콤한 성공을 맞이하기까지 우리에겐 수많은 실패와 내부 갈등, 그리고 어려움의 역사가 있었고, 이를 잊지 말자. 성공은 어려움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변화의 노력을 계속해 나가는 순간 기적처럼 찾아왔으며, 이건 크래프톤 구성원 모두의 노력의 결과이다. 이전과 같은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이 책을 통해 그간의 역사를 상기하고, 같은 실수는 되풀이 하지 말자'는 의도가 담긴 책으로 보입니다. 앞서 이 책을 난중일기로 비유했지만, 어쩌면 일종의 <오답노트>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크래프톤의 역사를 알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좋다 생각되는 부분은, 게임업계에서 벤처(스타트업)기업으로 시작하여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까지 성장한 회사는 어떠한 경영철학과 사내문화를 기반으로 운영되어 왔는가를 알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게임 산업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게임 제작사'는 어떤 방식을 통해 운영되는가도 잘 알게 되실 겁니다.
게임업계 문외한인 제 입장에서 본 바를 조금 정리하자면, 책 <크래프톤 웨이>의 진면목은 아래와 같습니다.
- 1. 게임제작사는 어떠한 방식을 통해 운영되는가?
: 출판사와 작가의 비유를 들자면, 게임 제작사는 작가이고, 게임 퍼블리싱업체는 출판사의 역할.
: 제작사가 퍼블리싱까지 겸할 수 있으나, 퍼블리셔에게 유통,마케팅, 홍보등을 맡기고 게임 개발에만 집중할수도 있음. 퍼블리셔를 끼는 것이 제작사 입장에서는 리스크 헷징의 효과가 있음.
: 게임은 '감성'이 주요하게 작동하는 흥행비즈니스이나, 사람마다 느끼는 재미가 각기 다르기에 게임회사의 출시작은 본질적으로 대박 아니면 쪽박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님.
: 게임 출시 초기 흥행은 그래픽이, 인기 유지는 기획이 담당.
- 2. 회사를 지속시키기 위한 '비전'은 왜 중요하며, 경영자는 직원들은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 '비전'이란, 구성원이 함께 공감하면서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가치. 이른바 공공선.
: 사명의 의미는 "명작 게임 제작에 대한 장인정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발자의 끊임없는 도전" (Keep the Craftsmanship On)을 의미. 게임제작 명가를 지향 & 글로벌 시장에서 성장하겠단 의미.
현재 크래프톤의 비전 _ (출처 : 크래프톤 홈페이지)
"많은 한국 조직이 오너에 충성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창업자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비전에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할 뿐입니다. 낯선 사람들이 하루종일 부대끼면서 굳이 모여 일하는 이유는 비전에 헌신하기 위함입니다." (장병규의 메시지 中)
: 창업자이자 투자자인 장병규(현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가 생각하는 인재론.
- 노동자 : 대체 가능한 사람. 회사의 현재를 유지하게 하는 사람들.
- 인재 : 대체 불가능한 사람, 회사가 잡아야 하는 사람. 이른바 피터드러커가 정의한 '지식근로자', 인재는 끊임없이 학습하고 '성과'를 내야. 회사는 성과에 따른 최고의 보상을 한다. 회사의 성장을 위한 열쇠를 지고 있는 사람들. 인재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기에, 회사는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 3. 사내문화는 왜 중요한가?
: 기존 기업들의 인사관련 조직에 문제가 있다 생각하여 '인사팀'이 아닌 '피플팀'이라 명명.
: 회사에 일이 아닌 정치풍경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 회사는 방향성을 잃었다 판단.
:뭐 이렇게까지 소통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소통이 이뤄짐.(IT업계 문화일수도)
- 대표이사와 직원들 간의 격의 없는 비판과 상호견제 등을 공개 메일로 수도 없이 주고받는 등.
- 어찌 보면 이것이 '젊은 꼰대'인가 싶다가도, 그 상사에게 직언하는 직원들을 보면 신선하기도.
- 첨부한 유튜브 영상의 토스팀 전사위클리 미팅(17분 40초 경) 모습이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됨.
: 제작리더십이 독립적으로 게임을 제작하고, 경영리더십은 마일스톤(프로젝트 과정상 중간점검을 위한 이정표들. 마일스톤까지 제작자들은 일정 결과물을 산출해 내야 한다.)을 기반으로 제작을 견제한다.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기에, 일상 견제가 아닌 중간 결과물을 견제).
: 경영과 제작 리더십은 프로젝트의 비전과 방향, 팀과 예산, 작업물에 대한 검증 방법을 두고 논쟁한다. (능동적 제작, 경영의 이성적 견제). 즉, 경영진은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마련하고, 제작진은 정해진 시간과 자원을 통해 결과물을 낸다.
: 책임의 강도 → 제작 리더십(사실상 회사의 방향을 이끄는 제작경영진인 까닭) > 경영진 > 구성원
(현재 크래프톤 대표이사인 김창한 역시, 제작리더십의 일원이었다.)
이 책은 경영진의 마음가짐, 제작자와 경영진, 그리고 직원들 모두가 공유하는 회사 비전의 중요성, 사내문화, 그리고 경영자가 바라보는 인재관과 경영철학들을 10년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크래프톤의 경영철학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생각들이죠. 특히 각 챕터별 말미에 기재된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장병규의 메시지들은, 한번쯤 곱씹어볼만한 생각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게임산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 스타트업의 경영철학과 사내문화의 구축 및 정착과정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셔도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