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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산책자 Jul 04. 2022

두려움을 극복하려 애쓰지 말자.

“탁, 타다닥…”

“타다닥, 탁탁…”

한남동 한 미술관의 고요한 도예 전시실 입구 한편, 시뻘겋게 화산이 분출하면서 흙이 소리를 내며 타다가 단단하게 용암으로 굳어져 흐르는 영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전시실로 바로 들어가려는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바라보았다. 흙이 타는 소리가 묘하게도 마음속에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그동안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취미는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으로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루어 놓곤 했었는데,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 영상의 여운 덕분이었는지 일단 관심 가는 일을 쉽게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국립 중앙 박물관의 도예교실에 참여하면서 한동안 매주 박물관에 갔던 적이 있다. 이촌역에서 내려 국립 중앙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는 늘 무언가 설렘이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면 눈앞에 한가득 펼쳐지는 하늘이 또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도예 교실에서 맨 처음 배운 도예 기법은 가래떡 모양으로 찰흙을 가늘고 길게 굴려서 만든 후에 원하는 그릇 모양으로 이어 붙이는 작업이었다. 커다란 찰흙 덩어리에서 주먹 반 줌 정도의 양을 떼어내어 모양을 다지고 열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기다랗게 만드는 작업은 처음에는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열심히 굴리다가 어느 한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가면 그쪽 찰흙은 바로 가늘게 눌려 버리기 일쑤였다. 둥글고 길게 만든 찰흙으로 몇 개의 층을 쌓다 보면 그릇 속 공간이 차츰 만들어지고 점차 원하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도예 수업이 계속되어 갈수록 찰흙을 다루는 솜씨가 점점 익숙해졌고,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도 꽤 나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다는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나는 그런 방면의 취미에는 소질이 없다고 나의 한계를 미리 규정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셈이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여 그릇을 만들어가면서 내면의 고요한 평화로움을 느끼는 도예 시간 그 자체도 좋았지만, 차가운 흙이 뜨거운 불의 온도를 견디며 단단함에 이르게 되는 도예의 이치 또한 나를 매료시켰다. 도예를 배우면서 생각했던 질문이 있었다. 미완의 형태 속에 수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흙의 원형과, 뜨거운 온도의 불을 견디어 가며 단단하고 아름답게 완성된 도예 작품 중 어느 쪽이 더 가치 있을까?  


두 가지 효용을 비교하며 가치의 무게 중심을 저울질하고자 하는 질문 자체가 그리 의미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질문은 계속된다. 아직 꺼내어지지 않은 가능성들을 끌어안고 고통 따위는 알지 못하는 채로 머물지만 무한히 유지되는 평안. 뜨거운 불 속의 고통을 느끼고 때로 무참히 깨어질 줄 알면서도 담대히 들어가는 용기. 살면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인생에 대한 진정한 책임감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결과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나의 본질 속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발걸음을 들여놓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시간들은 뜨거운 온도의 불 앞에 걸음을 멈추고 서성이기보다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두렵다 해도 피하지 말고 한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두려움은 사라졌다. 두려움을 극복해서도, 합리적으로도 떨쳐버려서도 아니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믿음, 발 밑 땅이 안정하게 있다는 합리적인 믿음. 이제 이러한 믿음은 나의 비행기에도 전이된다. 땅이 사라지면 믿음을 걸 만한 다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은 땅의 영원한 속박으로부터의 일시적인 탈주다” - <이 밤과 서쪽으로>, 베릴 마크햄


베릴 마크햄

대서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최초로 횡단한 여성 비행가인 베릴 마크햄의 자전적 에세이인 <이 밤과 서쪽으로(West with the Night)>에 나오는 내용이다. 강한 맞바람 때문에 대서양 서쪽으로의 비행은 당시 여간한 모험이 아니었다. 베릴 마크햄은 1902년 영국 레스터셔에서 태어나 1906년에 아버지와 단 둘이 미지의 땅이었던 아프리카 케냐로 이주하여 원주민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광활한 아프리카와 삶을 함께 하게 되었다. 1931년부터 그녀는 아프리카의 유일한 여성 비행사로 아프리카 곳곳을 비행하며 우편물과 승객을 수송하고 하늘에서 코끼리 떼를 수색하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1936년 9월, 아멜리아 에어하트와는 반대로 대서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베가 걸(Vega Gull)’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조종하여,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21시간 25분 만에 단독 비행에 성공했다.     


칠흑 같은 어둠의 대서양, 그리고 그 바다 위 하늘을 거침없이 나는 한 대의 비행기. 푸르고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는 사자, 얼룩말들, 코끼리 떼. 광활한 아프리카의 하늘.      


<이 밤과 서쪽으로>를 읽으며 떠오르던 풍경들이다.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도, 일상의 익숙한 흔적들 속에서도 늘 생각이 많고 망설임이 많았던 나로서는, 인생에 대한 베릴 마크햄의 명확함과 용기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삶의 불가능한 영역에 대한 두려움이 차지하는 자리를 새로운 기대와 도전으로 대체한다는 것, 두려움을 극복하려 분투하는 대신에 다른 무언가로 자연스레 그 자리가 채워진는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었다는 점은 나에게 일종의 발견이기도 했다.


도예를 하면서 더 잘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그릇 모양이 예쁘게 만들어지질 않는다. 내 도예 솜씨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조금 더 유연하게, 좀 더 힘을 빼고, 더 잘하고자 하는 욕심도 버리고, 그저 현재의 내 호흡에 집중하는 순간들이 이어지는 바로 그때였다. 찰흙으로 ‘비움’을 만들어 가다 보면 어느새 그릇 모양이 완성되었다. 나의 글쓰기도 그렇게, 시끄럽고 어수선한 내 마음속에도 좀 더 힘을 빼고 그렇게 빈 공간을 만들어가면서 시작해나가기로 했다. 그 작은 시작의 용기가 어느덧 그 안에서 두려움도 다 사라져 보이지 않을 넓고 푸른 하늘을 내 마음속에 만들어 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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