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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머 Feb 10. 2024

돈 오백원이 어디냐고

조조할인_이문세@1996

우리 부부는 연애할 때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커플이었다. 만나면 영화 보고 밥먹고 커피 마시거나 밥먹고 영화보고 커피 마시는 성실하기 짝이 없는 데이트에 충실했다. 그런데도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주구장창 시간만 나면 만나러 쫒아갔나 모르겠다. 밤 열시고 열한시고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회사 앞까지 와서 얼굴도장을 찍고 갔다. 막차 놓지겠다고 동동거리면서도 뻔한 월급통장 까먹으며 야식거리를 들고 오는 날도 있었고 어느 날엔가 무심결에 말한 텀블러를 사들고 온 날도 있었다. 새벽 두시가 가까워 드디어 둘 다 퇴근을 했다며 신이 나서 산낙지를 먹으러 간 날 꿈틀거리던 낙지보다 우리가 더 애달팠다.


서로 야근 스케줄 때문에 주중에 만나면 늘 한 밤중이었고 직업상 주말에도 출근이 잦아서 모처럼 일 없는 주말이면 나는 단잠이 그리운 그 사람에게는 씨도 안 먹힐 핑계들로 더 일찍 만나야 한다고 극성을 떨었다. 그리고 언제나 피곤에 쩔어 기억에 남을 데이트며 기념일 이벤트 따위를 고민하기에는 기력이 모자랐으므로 우리는 늘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것들을 했다. 그래서 우리의 데이트 기록은 봉천동 자취방 포도몰 근처와 회사근처 코엑스에 몰려있다. 안타깝게도 포도몰도, 코엑스도 싹 뜯어고치는 바람에 우리 추억도 같이 날아가버렸지만.  


어슬렁 어슬렁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순수하게 흠모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안 점심시간 마다 뒷따라 걸어가면서 길게 늘어진 팔이 흐느적 거리다가 주머니에 들어가고 뒷짐을 지고 다시 흐느적 적거리는 것을 보다가 조금씩 그 뒷모습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조금 빠르게 걸어가서 늘어진 저 손을 잡으면 어떨까, 등에 코를 묻으면 어떨까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둘 다 어지간히도 답답한 성격이라 이리 저리 어긋나버렸다. 그땐 그가 짝이 있었고 그 후엔 내가 짝이 있었고, 뭐 그런 스토리. 그리고 둘이 각자 다른 회사로 가게 되고 한참 후에 어찌 어찌 다시 만났을 때 취기에 그 손을 잡았다. 답답한 청춘들.


모든 것이 느긋한 그는 차근히 준비해서 결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격급한 나는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신혼집은 고사하고 결혼식장 비용도 못 모았다는 그에게 생떼를 쓰며 결혼하자 칭얼거려서 오피스텔 한 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객들 지갑으로 결혼하고 카드사 신용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의기양양 그것보라며 결혼에 돈이 왜 필요하냐고 심지어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되었으니 데이트 비용도 아끼고 얼마나 좋으냐고 깔깔거렸다. 즉석밥에 소시지를 구워먹어도 맛나고 침대에 드러누워 열번도 더 본 영화를 돌려봐도 재미났다.


그렇게 꼬박 10년이다.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나의 반려인과 결혼한지 올해로 장장 10년이 흘렀다. 풍랑에 일렁이는 돗단배에서도 느긋하게 낮잠을 잘 것 같은 그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반면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같은 사람이라 점점 더 그 사람에게 성가신 쇳소리를 낸다. 이것도 저것도 답답한 것 투성이라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오늘도 출근하는 그에게 싫은 소리를 헀다. 출근이 늦는 것은 그렇다 쳐도 둘째 등원 시간은 지키자며. 일주일 째 새벽에 들어와 기진맥진인 것을 알면서도.


조조할인으로 꼬득여서 일찍 불러낸 것은 언제나 나였는데 되려 시시하게 영화나 본다고 툴툴거리고 있다. 가만히 앞서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도 다정하고 따뜻한 그 사람의 앞모습은 얼마나 쓸쓸할까. 등뒤에 붙은 껌딱지가 욕지거리나 퍼붓고 있으니.


괜한 미안함에 점심 도시락을 쌌다. 결혼하고 10년만에 처음이다. 왜인지 거창하게 보이기 싫어서 차곡차곡 샐러드를 쌓았다. 초록잎 위에 퀴노아를 얹어서 방울토마토를 썰어 올렸다. 귤보다 향이 진한 천혜향은 속살이 드러나도록 잘라 올려야 하지만 금방 먹지 않으면 말라버릴까봐 그냥 주머니를 살려 올렸다. 그리고 건크렌베리와 호박씨도 뿌려주고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 눅진한 드레싱이 없어도 재료맛이 가득한 우리집 샐러드는 우리 결혼 생활 같다. 간소하고 멋없지만 날 것 그대로 진심인 풋내 가득한 첫사랑



https://youtu.be/mYJsayudN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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