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거운 질문 앞에서
새로운 직업이 매일같이 등장하고 직장의 의미가 달라지는 격변기에, 진로 탐색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묵직한 고민이다. 덩이씨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예언하기보다, 주변에서 접한 경험과 사회과학 박사들의 커리어 멘토링에서 주워들은 바를 토대로 이 부담스러운 주제를 다루어 보려 한다.
한때 대한민국의 중학교에서는 자유학기제를 도입했다.
현시점 다수의 대학은 무전공제를 추진하며 전공 선택을 위한 탐색의 시간을 제도적으로 담보하고 있다.
그러나 박사과정은 입학하는 그 시점부터, 갈고 닦인 좁은 렌즈로 특정 분야를 파고 또 팔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 입학 시즌마다 지켜본 바로는, 대다수의 교수들은 자기 분야와 조금이라도 일치하지 않는 학생은 아무리 훌륭한 이력을 내밀어도 "그건 내 분야가 아니야"라며 거절한다. 간택된 학생들은 특정 연구실로 배치되고, 전공에 특화된 주제를 파고 또 파면서 한두 가지, 많아야 세 가지 정도의 전문성을 단련한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박사들이 생각하는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안다"와 결이 다르다. 덩이씨 바로 옆에 있는 찐 교수는 특정 제도를 10년씩 연구하며 논문을 쓰는 사람이다. 덩이씨도 그 제도를 다른 방식으로 혹은 다른 접근법으로 몇몇 논문에서 다루어 보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핵심 분야가 아닌 이상 잘 모른다고 느낀다. 그 교수가 훨씬 더 깊이, 오래 그것을 붙들고 파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함부로 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은 심리적 압박이 늘 존재한다.
게다가 승진과 정년을 평가할 때 주요 지표가 되는 것은, 이른바 'Line of Scholarship'의 명목으로 두세 가지 주제를 꾸준히 갈고 닦은 성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초짜 교수 시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조언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협업 요청을 받았을 때 그것이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두세 개의 바구니 안에 들어가는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즉, 바구니를 들고 과수원에 가는데, 사과와 복숭아를 중점으로 하는 사람이 딸기밭에서 어슬렁대지 말라는 뜻이다.
현실이 이러하니, 이러한 암묵적 합의는 박사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런 접근은 정년트랙 대학교수직을 또는 특정 연구소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꽤나 도움이 된다. 하지만 회사나 비영리재단 같은 다른 분야를 희망할 경우에는 다른 시각을 필요로한다.
덩이씨는 박사 1년차 때 커리어 멘토링 세션을 다녀온 4년차 친구에게 카네기 분류에 대해 처음 들었다. 카네기 분류는 카네기 교육재단이 미국 고등교육 기관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비교의 틀이다. 과거에는 주로 연구 집중도에 따라 R1, R2, R3, 리버럴 아츠 등 단일 기준으로 분류되었으나, 2025년에 분류 기준을 개편하여 기관 분류(Institutional Classification), 학생 접근성 및 소득 분류(Student Access and Earnings Classification), 연구 활동 지정(Research Activity Designation) 등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하며 복잡성을 더했다.
구직자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분류, 즉 연구 집중도에 따른 R1, R2, 리버럴 아츠 칼리지 등의 유형이 각 기관의 기대치를 가늠하는 데 유용하다.
R1. 최상위 연구중심 대학
연간 R&D 5천만 달러 이상+ 박사 70명 이상. 187개 대학이 여기에 해당. 우리가 흔히 이름을 아는 유수의 명문대와 주요 주립대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는 박사생 대부분도 R1 대학에서 길러진다. 교수의 티칭 로드는 2:2(학기당 2개 강좌)가 기본이며, 연구 성과를 가장 중시한다. 포닥(Post-Doctoral Fellowship)을 고용하는 학교도 대부분 R1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논문 출판 실적과 그랜트 수주 경험을 중점적으로 검토한다. 교수진이 R2나 다른 R1에서 이직해 오는 경우도 많다.
R2. 고위 연구중심 대학
연간 R&D 5백만 달러 이상 + 박사 20명 이상. 티칭과 연구를 적당히 균형 있게 강조한다. 교수의 티칭 로드는 보통 3:3이다. 잘 알려진 주립대와 사립대 중에 R2가 상당히 많다. 대학 자체는 R2이더라도, 단과대나 전공에 따라 연구를 중점에 두는 경우가 있어 질 높은 박사과정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 많은 총장들이 R1 승격을 목표로 제시하는데, 그에 따라 R1과 같은 연구 인프라는 없으면서도 그랜트 수주를 강하게 압박하는 문화가 있는 곳도 있으니 눈여겨 보아야 한다.
리버럴 아츠 칼리지
학부 교육 중심, 소규모, 학부 교육에 초점을 둔 학교로 Williams, Amherst, Bowdoin, Wellesley College 등이 명문으로 손꼽힌다. 1,000~3,000명 규모로 작고 비판적 사고, 인문,사회, 자연과학 등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학문을 강조한다. 명문 리버럴 아츠를 졸업하고 로스쿨, 메디컬 스쿨로 진학하거나 아이비 대학원 과정으로 진학하여 박사가 사례도 많이 본다. 연구 실적이 있으면 좋지만, 가장 최우선순위는 수업과 학생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교수법(pedagogy)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며, 지원 시에는 티칭 경력이 이력서 앞쪽에 배치되어야 하고, 수업 철학에 관한 문서를 성실하게 작성해야 한다. 학부생과 함께한 연구 경험, 소규모 세미나 운영, 학제 간 교과 설계 경험이 있다면 더욱 유리하다. 자신의 연구가 학부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 밖에도 석사수여 중심 대학, 주립 지역 대학, 커뮤니티 칼리지 등 미국 대학의 유형은 다양한다.
대학 교수직을 희망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강점과 삶의 가치를 토대로 어떤 유형의 학교에서 일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학회에 가서 R1이 아닌 학교에 있는 교수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그들의 삶은 어떠한지 직접 물어보고 들어보는 것도 유익한 정보가 된다. 어느 멘토링 자리에서 한 교수가 자신의 경험을 마치 보편적 진실처럼 이야기하며, R1이 아닌 학교의 교수 모두가 R1을 갈망하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마름이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이런 경향은 가르치는 행위 자체를 평가절하하는 연구중심 대학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교육에 열정을 느끼고, 연구도 하고, 적당한 일과 삶의 균형을 원한다면 R1이 유일한 선택지여야 한다는 논리는 틀렸다.
어느 지역에 살고 싶은지도 중요한 변수다. 예를 들어 California State University 대다수의 캠퍼스는 UC 시스템과 다르게 박사 교육과 연구가 중심이 아니다. 기본 티칭로드가 4:4 이며 좋은 선생님이기를 강조한다. 연구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환경은 아니지만 지역 특성상 R1 명문대의 박사과정을 졸업한 교수들이 적지 않다. R1에서 R2나 리버럴아츠로 이직하는 교수들도 상당하며, 덩이씨 분야에는 교육적 경험을 토대로 영향력 있는 좋은 책을 출판하는 학자 중 상당수가 R1에 근무하지 않는다.
대학이 아니더라도 박사시절 갈고 닦은 스킬은 다른 곳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다.
인문사회과학 전공자라면 국제기구, 비영리재단, 정책 씽크탱크, 유수의 연구기관 등에서 박사급 연구원을 찾는 경우가 많다. 티칭 없이 연구만 할 수 있어서 연구센터를 택하는 사례도 많다.
기업도 관련 부서나 연구 직군에서 박사학위를 우대하는 공고가 나온다. 알고 지내던 멘토 교수님은 정년 심사를 앞두고 꾸그리로 이직해서 몸 값을 한 껏 올린 후 잘 살고 계신다.
자신이 배운 기술을 토대로 창업을 택하는 사례도 종종 본다. 오늘 참석한 온라인 워크숍 강사도 박사때 배운 기술을 토대로 창업자로 살고 있었다. 창립자라니, 월급만 바라보며 살아온 덩이씨는 부럽다.
마지막으로 박사과정생활이 일찌감치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지 않음을 알고 그만두고 다른 길로 찾는 용기 있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나가서 더 잘 산다. 누구는 변호사가 되었고 누구는 작가가 되었다. 시민단체 리더로 열정을 다하며 사는 누구도 있다.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훌륭하다.
다만 이러한 다양한 길은 대학원 교육과정에서 체계적으로 안내해 주기보다는, 인턴십 기회나 커리어 센터의 네트워킹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과정 중에 스스로 탐색해 보는 것이 좋다. 대학이 아닌 곳에 지원할 때는, 대학원에서 길러낸 수많은 기술들을 충분히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이 다양한 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꽃필 수 있는지를 잘 파악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들은 많은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도교수나 명망있는 교수들과 자신을 비교 하지 말자.
기업에서 일하는 박사님이 말해주었다. 박사들이 제일 잘 하는 것이 배우는 거라고.
그러니 잘 모른다 겁먹지 말고 궁금하고 원하는 곳이 있으면 과감하게 지원해 보시길.
Photo by Aditya Saxena on Unsplash
© 2026. 작가김덩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