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마음 읽기

비교 우위와 생산성의 신화에 잡아 먹히지 않도록

by 작가김덩이

어느 날 문득 잠자리에 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자고 일어나면 그 사이 또 얼마나 많은 논문이 출판될까?

인간과 달리 달리 피곤할 줄 모르는 이메일은 주요 저널에 출판되는 논문 리스트를 꼬박꼬박 보내준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제목을 보고 몇몇은 '읽기' 폴더에 저장한다. 하지만 이 쌓여가는 파일은 마음을 짓누른다. 머리를 털며 생각한다. "안 읽어도 괜찮아... 나 건강하고 오래 살아야 해." 주문을 외우다 잠을 청한다.



어느 해는 그랬다.

SNS에서 덩이씨의 생일을 축하하는 댓글보다, 3년을 준비해서 나온 ~~하XX 저널에 실린 논문 소식에 달린 축하 댓글이 더 많았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이런 곳인가. 교수들의 은밀한 수다에서 다루었듯이, "좋은 소식 없니?"라는 안부에서 나오는 말들은 "네모씨 몇 억짜리 XX 연구 사업을 땄다더라. 오각씨는 그 내기 어려운 ++ 저널에 단독으로 이번에 논문 나왔더라. 팔각이는 이번에 $$ 상 받았더라." 와... 너무너무 축하한다... 대단하다 짝짝짝! 그래 나도 부럽구나!!

혼자가 된 마음은 또 고민한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어디까지 얼마나 목표로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슈퍼스타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어"

얼마 전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멘토링 세션에서 학생을 잘 챙기시기로 유명하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 덩이씨는 생각한다.

저렇게 대단한 결심을 슈퍼스타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수많은 교수들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니! 마음의 대가이시구나.

바로 앞 패널로 있던 다른 교수들은 어떻게 해서 연구비를 더 많이 따오고, 어떤 방식으로 연구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는지를 열정적으로 토로했었다. 같은 공간에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그녀의 선언은 학생들과 주니어 교수들에게, 흔히 잘 나가는 표본처럼 일하지 않더라도 "교수"라는 직업 연구자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덩이 씨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노벨상을 탈 것도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야.
오~~~ 래,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나의 장기를 아끼고 1초라도 노화를 늦추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학교에서 바라는 돈과 랭킹과 영향력이라는 성과 지표는 나를 갉아먹고 대학을 배 불리는 일이다.

비교 우위에 마음이 흔들리는 위기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나마 대학원 시절엔 "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특권이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직업전선을 잠시 유예하고 박봉으로 살게 하는 그들에게는 그래도 하고 싶은 분야를 마음껏 공부하도록 하라는 어느 정도의 자유와 방임이 주어졌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 덩이도 유창하게 말 잘하는 아이, 글 잘 쓰는 아이, 논문 많이 쓰고 직장 잘 잡는 타인들이 무척 부러웠다. 하지만 나름의 '전인교육'에 정진하는 학교 환경과 커뮤니티에 기대어 재미를 따라 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대학의 전인교육에 관해서는 04 학교캠퍼스엔 뭐가 많다 를 찾아보시길.


교육 정책이나 개혁에서는 번번이 학교가 사회를 위한 "준비"의 과정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우긴다. 하지만, 박사 과정 시절 덩이에게 대학원은 치열한 성과주의와 경제적 논리에서 조금은 빗겨나가 어떤 연구자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던 더욱더 값진 시간을 담보해 주기도 했다. 어쩌면 교육철학자 Biesta의 주장처럼 사회가 학교를 위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Biesta, 2022). 그 실현이 어렵다 해서 상상할 권리조차 빼앗길 수는 없으니.


그 시절엔 아카데미아라는 환경에서 노동자로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너네 아메리카는 돈이 종교잖아"라는 진심 어린 농담을 주고받는 이곳에서, 9개월 계약에 (여름 방학에도 일하지만 기본적으로 월급을 안 준다) 주 40시간 (실제로는 60시간 넘게 일한다)이라는 직장을 잡고서야 알았다 [1]. 생산성(productivity)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과, 그에 부합하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암묵적이면서도 명시적인 평가 기준과 규범이 주는 위험성을 극명하게 깨닫는다.


물론 회사는 더 하겠지만, 다른 점이라면 학계는 돈이 아닌 "교육"과 "지식 생산"이라는 그럴듯한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결국은 돈 되는 연구와 수업, 랭킹 올리기에 좋은 사업과 각종 서비스에 매진하기를 교묘하게 칭찬하고 쥐꼬리만 한 보상을 주면서 채찍질한다.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주문을 자주 외우며, 비교 우위의 잣대 속에 나를 올려놓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여름, 김애란 작가님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작품 속에서 불편함을 전하는 어떤 지점은 덩이 씨가 학계에서 마주하는 불편함과도 닮아 있었다. 김형철 님의 평론처럼 그녀의 작품이 오늘날 관계와 인간의 존재 양식까지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기제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직업 연구자들이 살아가는 터전도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대학원에서 학문하기를 하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잠시라도 그곳에서 성과주의와 생산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마음의 근육을 기를 수 있기를 마음으로 응원한다.



[1] 참고로 정년트랙에 있는 미국 교수직은 대체로 9개월 계약이다. 여름 수업을 따로 하거나 리서치 펀딩을 추가해서 받을 수 있다면 추가로 여름 월급을 받을 수는 있다. 테뉴어 심사를 앞둔 교수들은 주로 여름에 몰아서 논문을 쓰고 성과를 내야 하기에 여름엔 수업보다 연구에 집중한다. 여러 가지 이해되지 않는 시스템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가 교수직의 9개월 계약이다. 물론 행정 업무를 하거나 계약직 교수들은 12개월 계약도 종종 있다.


© 2026. 작가김덩이. All rights reserved.




이전 10화읽고 쓰기의 무한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