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성과 우선성
우리의 삶은 수많은 결정과 선택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슬프게도 우리는 선택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무지와 공포라는 숙명을 지고 태어난 인간들은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고, 비교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돈은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가장 편리한 도구였으며,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도구였다. 갖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돈을 지불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돈과 시간의 배분을 통해 인간들은 가치 있는 것들을 정립해갔으며 스스로의 기준과 우선순위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금기처럼 여겨지는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인간관계의 영역이다. 그중에서도 연인이라는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해 어떤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이 이기적인 행위처럼 여겨졌다. 연인끼리 다툴 때 등장하는 "우정이야? 사랑이야?" 같은 고전적인 질문은 아직까지도 그 강력한 파괴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 힘의 근원은 '선택해서는 안 되는 영역을 선택의 영역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도대체 사랑하는 나를 두고 어떻게 친구를 만날 수가 있지?'와 같은 생각에 뿌리를 둔다. 그런데 이런 문장은 스스로 모순을 갖고 있다. 이미 스스로가 '사랑'이 '우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개인의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그렇다. 사랑이라는 것의 가치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니까, 사랑은 애초부터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때에 따라서는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사랑은 원래 변한다.
우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것이 사랑일까? 이것을 정의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개인마다 정말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특이하게도 문화를 뛰어넘어,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은 분명히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인지하게 되는 대상은 대개 부모다. 자신의 잠과 꿈을 희생해가며 아기를 돌보는 그들의 사랑을 아기들은 분명히 느낀다. 그리고 이 사랑은 부모에서 가족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때가 온다.
바로 친구다. 이상할 것이다. 어쩌면 듣기 거북할 수도. 우리에겐 '친구와 사랑'이라는 조합보다는 '친구와 우정'이라는 조합이 더 익숙하다. 하지만 우정 역시 사랑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하나 남은 떡볶이를 양보하고, 밀려 못한 숙제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것이 사랑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절친한 친구들과 놀던 때를 떠올려보자.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게임을 하다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다거나, 새벽에 탈출하여 부모님 몰래 밖에서 놀다 오거나 하는 경험들 말이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우정이 전부다. 전학 때문에 친구들과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친구들을 사랑할 때, 부모님은 사랑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사랑하면서 여전히 부모님도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을 사랑의 영원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는 누군가 사랑하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단지 마음의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누군가를 더 사랑할지를 정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의 우선성이다. 어색할 것이다. 사랑에 크기와 순서가 있다니. 우리의 몸은 하나이기 때문에 수많은 결정과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마음이라고 다를 것 없다.
그렇다면 친구 이후 우리는 어떤 사랑을 만나게 될까.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의 시기를 지나 어느 순간 연인이라는 존재를 만난다. 우리는 대개 연인과의 연애를 시작할 때 두근거리고, 뭔가 설레고 떨리는 이 감정만을 지칭해 '사랑'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랑의 한 종류일 뿐이다. 사실 설레고 떨리는 감정들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연애감정'에 가깝다. (연애감정과 사랑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비교해보겠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부모님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생각한다. 단지 연인에게 더 많은 마음을 쏟을 뿐이다. 같은 원리로 누군가는 반려동물을, 누군가는 일을, 누군가는 자식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확장해나간다.
연인의 사랑도 결국 변한다. 연애 초반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형태는 변화한다. 누군가는 이를 가리켜 편해진 것이라 표현하고, 누군가는 마음이 식은 것이라 표현한다. 이는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다. 서로가 확인해야 할 것은 변화한 형태의 사랑을 서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다. 그 사람과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우선성을 포기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 항상 최우선이기를 바란다면 영원하기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영원하면서 항상 서로에게 최우선이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만큼 다른 영역의 사랑을 포기했을 것이다. 일이라든가, 친구라든가. 당연하게도 이 역시 개인의 선택이다. 만약 서로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거기서 끝나야 바람직하다.
나는 둘 중 영원성을 선택하는 것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다. 결국 변화하는 사랑이라면, 나를 대체한 최우선의 무언가에 대한 사랑 역시 언젠가는 저 뒤로 밀려날 것이다. 반대로 내가 다시 상대방의 최우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영원하기를 바라는 만큼, 나 역시 상대방에게 영원한 존재여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과 신뢰다.
사실 영원하도록,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할 존재가 있다. 그러니까, 영원성과 우선성을 동시에 갖고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앞 문단에 힌트가 있는데,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존재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이를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또 이와 비슷하지만 뭔가 다른 느낌의 '자존심'이라는 말이 있다. 다음번에는 이 둘에 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