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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색 자전거 Dec 07. 2023

명작의 조건, 그리고 전율의 조건

난 어떤 작품에 열광하는가 - 밀란 쿤데라 作 「불멸」

'명작의 조건'이라, 지으면서도 참 도발적인 제목이라 생각했다. 명작의 조건을 규정하는 것은 명작과 명작이 아닌 것을 구분 짓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명작의 조건을 선언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얼마나 영향력 있는가와 별개로, 문학의 특성인 자유를 명작이란 이름 아래에서 묵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이보다 적합하고 간결한 제목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글, 좋아하는 작품의 특징에 관해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보편적인 명작과 그것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은 아니다. 이번 글에서 대상이 될 작품을 묘사하자면,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며 '명작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그런 작품이다. 서술의 편의를 위해, 나만의 명작이라는 단어 대신 단순히 '명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겠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 「보바리 부인」의 서브남주(?) 레옹의 다음 대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부인께서는 책을 읽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없으세요? 옛날에 가졌던 막연한 생각, 또 아주 먼 곳에서 돌아오는 것 같은 희미한 영상, 그리고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 이런 것이 책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¹


사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명작의 특징이자 조건이다. 무릇 명작은 이런 것들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게 명작이 된 책 한 권을 살펴보며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바로 밀란 쿤데라의 「불멸」이다.


사실 이 책은 구조가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인용할 부분이 책의 6장, 끝부분이기 때문이다. 너무 고맥락이라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할 수 있는데, 괜찮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작품답게(...), 이 책의 6장은 아예 다른 이야기처럼 시작하기 때문이다.


「불멸」 6장 <문자반>에는 '루벤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작품에서 해당 인물이 어떻게 소개되는지를 옮겨보겠다. ² ³


고등학생 시절, 그는 많은 시간을 박물관에서 그림을 바라보며 보냈고, 집에서 고무수채화를 수백 점 그렸으며, 선생들의 캐리커처를 그려 학우들에게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런 캐리커처를 학생들이 운영하는 등사판 잡지에 크레용으로 그려 싣거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흑판에 분필로 그려 급우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그에게 영예라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그를 칭찬했으며 모두가 농담 삼아 그를 루벤스라고 불렀다. 이 멋진 시절(그의 유일한 영광의 해들)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는 일생 동안 이 별명을 간직했으며 (뜻밖에 천진하게도) 친구들에게 자신을 이 별명으로 부르길 요구했다.


(참고로 루벤스는 바로크 시대의 화가이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주인공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아래의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그리고 루벤스는 꿈을 좇는 여러 젊은이들이 그렇듯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루벤스는 몇 번인가 다시 도전하지만 결국 그 자신의 꿈을 다시 일으키지 못한다.


(전략)
거듭되는 실패에 지쳐 그는 포기했다. 이에 대해 물론 우리는 (그도 의식했던 사실이지만) 데생과 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의 생각만큼 강렬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자신에게 화가의 천분이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 깨달음에 우선 그는 실망했다. 그러나 곧 어떤 도전과도 같은, 체념에 대한 변명이 그의 마음속에 울렸다. 왜 그렇게 그림에 열을 내야 한단 말인가? 그 열정에 뭐 그리 자랑할 만한 게 있는가? 엉터리 그림들, 엉터리 시들 대부분은 바로 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어떤 사명, 어떤 의무(그들 자신을 향한, 즉 인류를 향한)를  보기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닌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면서부터 그는 예술가와 작가들을 재능보다는 야심 많은 작자들로 보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그는 그들을 피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스토리를 지나 그는 법학, 재정학 등을 공부하고, 예술과는 적어도 직업적인 부분에서 거의 관계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술관에 들러 옛 그림들을 보고 거기에 다시 한번 매혹된다. 그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서 보다 최근 그림을 보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는 방금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전략)
한데 좀 더 최근 그림들이 전시된 위층에 올라가자 루벤스는 자신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즐거운 붓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쁨의 흔적도 없었다. 황소들과 투우사들도 사라져 버렸다. 화폭들은 실세계를 추방해 버렸거나, 아니면 둔하고 냉소적인 충실성으로 실세계를 모방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 두 층 사이에는 죽음과 망각의 강, 레테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루벤스는 자신이 끝내 그림을 포기하고 만 것은 단순히 재능이나 끈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보다 심오한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불현듯 그는, 그것이 사실이냐와 별개로 현재의 미술이 자신이 상상하고 막연하게 떠올리던 그것과는 다름을 느낀 것이다. 루벤스는 최근의 미술 작품에서 덧없음을 느꼈다.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내 소설 속 루벤스는 위대한 화가가 될 소질이 있었는가? 아니면 전혀 재능이 없었는가? 그가 화필을 던져버린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림의 덧없음을 명철하게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인가? 물론 그는 종종 랭보를 생각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곧잘 자신을 그와 비교하곤 했다. (부끄러움과 아이러니를 느끼기는 했지만.) 랭보는 시를 가차 없이 근본적으로 내던져 버렸을 뿐 아니라, 그 후 활동 역시 시에 대한 풍자적인 부정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무기 밀매에 뛰어들었고 흑인 매매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이 두 번째 주장이 그를 비방하는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랭보가 얼마나 격정적이고 열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으로 시인으로서의 과거를 끊어버렸는지를 과장해서 잘 나타낸다. 루벤스가 점점 더 투기꾼과 재정가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 역시 아마도 그가 (옳건 그러건 간에) 그런 활동을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꿈과 정반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줄 한 줄 읽을 때마다 새롭게 놀라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가 수상할 정도로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때 수학자를 꿈꾸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나는 머지않아 수학자가 될 거라 믿었고, 다른 사람들도 적어도 내가 수학을 전공하게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어떤 난제를 접했고, 그것을 푸는 데 실패한 나는 얼마 후 더 나아가기를 포기했다. 겨우 고등학생 시기에 내린 섣부른 판단이었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 후 나는 새로운 진로를 찾아야 했다. 꿈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던져진 기분으로 진로를 탐색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탐색을 진행하며, 이 책의 말마따나 나는 '강박적으로' 수학과 거리가 먼 진로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 자체를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수학자를 포기했다고 해서 그 배경지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따라서 진로로 수학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분야를 선택하는 게 뭐가 되었든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런 진로를 애써 무시했다.


나는 루벤스를 읽으며 나를 떠올렸고, 나를 떠올리며 루벤스를 이해했다. 여기서 떠오른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이런 책은 왜 나를 부끄럽게 하는 것일까? 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이런 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난 그 이유가, 이 책의 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일반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소개한 루벤스는 분야만 다르지 그 패턴에서 그냥 나와 다름없다. 나조차도 활자화해내지 못했던 내 모습들이다. 그만큼 구체적인 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책은, 그것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여준다.


루벤스의 선택은 결론만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미술을 포기한 사람이 강박적으로 미술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직업을 고른다고?' 아마 내게 비슷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를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 뭐... 분야 자체가 싫어졌나 보네.'


그러나 작가의 펜을 따라가고 내가 왔던 길을 되짚어 보다 보면, 현재의 나는 루벤스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곧, 비로소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그런 선택을 했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이 책은, 동시에 나를 위로해 주는 책인 것이다.


사람들은 한없이 구체적인 인간이 되어가며 정체성을 확립하지만, 동시에 고독해진다. 나에게 있어 명작은 그 고독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나를 끌어올려 주는, 그럼으로써 나를 위로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이다.




¹ 사실 이 말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핵심인 사실주의와 그 옹호를 정말 잘 보여주는 대사라 의미가 깊기도 하다.

² 이 문장들은 「불멸」 6장 안에서도 곳곳에서 찾아 가져온 것들이다. 문장들 사이에 비약이 있을 수 있고, 어쩌면 내가 이해하지 못한 행간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

³ 인용에서 괄호 안에 있는 텍스트는 필자가 추가한 것이 아님을 일러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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