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떤 작품에 열광하는가 - 밀란 쿤데라 作 「불멸」
"부인께서는 책을 읽다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없으세요? 옛날에 가졌던 막연한 생각, 또 아주 먼 곳에서 돌아오는 것 같은 희미한 영상, 그리고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 이런 것이 책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¹
고등학생 시절, 그는 많은 시간을 박물관에서 그림을 바라보며 보냈고, 집에서 고무수채화를 수백 점 그렸으며, 선생들의 캐리커처를 그려 학우들에게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그런 캐리커처를 학생들이 운영하는 등사판 잡지에 크레용으로 그려 싣거나,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흑판에 분필로 그려 급우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그에게 영예라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고 그를 칭찬했으며 모두가 농담 삼아 그를 루벤스라고 불렀다. 이 멋진 시절(그의 유일한 영광의 해들)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는 일생 동안 이 별명을 간직했으며 (뜻밖에 천진하게도) 친구들에게 자신을 이 별명으로 부르길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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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되는 실패에 지쳐 그는 포기했다. 이에 대해 물론 우리는 (그도 의식했던 사실이지만) 데생과 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의 생각만큼 강렬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자신에게 화가의 천분이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 깨달음에 우선 그는 실망했다. 그러나 곧 어떤 도전과도 같은, 체념에 대한 변명이 그의 마음속에 울렸다. 왜 그렇게 그림에 열을 내야 한단 말인가? 그 열정에 뭐 그리 자랑할 만한 게 있는가? 엉터리 그림들, 엉터리 시들 대부분은 바로 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한 자신들의 열정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어떤 사명, 어떤 의무(그들 자신을 향한, 즉 인류를 향한)를 보기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닌가?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면서부터 그는 예술가와 작가들을 재능보다는 야심 많은 작자들로 보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그는 그들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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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좀 더 최근 그림들이 전시된 위층에 올라가자 루벤스는 자신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다. 즐거운 붓질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쁨의 흔적도 없었다. 황소들과 투우사들도 사라져 버렸다. 화폭들은 실세계를 추방해 버렸거나, 아니면 둔하고 냉소적인 충실성으로 실세계를 모방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 두 층 사이에는 죽음과 망각의 강, 레테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루벤스는 자신이 끝내 그림을 포기하고 만 것은 단순히 재능이나 끈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보다 심오한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내 소설 속 루벤스는 위대한 화가가 될 소질이 있었는가? 아니면 전혀 재능이 없었는가? 그가 화필을 던져버린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림의 덧없음을 명철하게 꿰뚫어 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인가? 물론 그는 종종 랭보를 생각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는 곧잘 자신을 그와 비교하곤 했다. (부끄러움과 아이러니를 느끼기는 했지만.) 랭보는 시를 가차 없이 근본적으로 내던져 버렸을 뿐 아니라, 그 후 활동 역시 시에 대한 풍자적인 부정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무기 밀매에 뛰어들었고 흑인 매매까지 했다고 하지 않는가.
비록 이 두 번째 주장이 그를 비방하는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랭보가 얼마나 격정적이고 열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으로 시인으로서의 과거를 끊어버렸는지를 과장해서 잘 나타낸다. 루벤스가 점점 더 투기꾼과 재정가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면, 이 역시 아마도 그가 (옳건 그러건 간에) 그런 활동을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꿈과 정반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