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바탕으로 생기는 주된 논쟁은, 이 소년의 행동과 사고가 작중 배경으로 등장하는 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도기에서 필연적으로 보이는 비행적 행동 때문인지이다. 즉, 마르트 죽음의 책임 소재가 전쟁이라는 배경에 있는지, 소년이라는 인물 개인에 있는지이다. 사실 난 당연히 둘 다 그 소재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 그렇다. 소년은 원래 저렇게 치기 어린, 미성숙한 행동을 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마르트와 소년은 저런 관계로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만 어리숙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는 어른들이 더 어른들답지 못한 모습을 여럿 보여준다. 본 소설이 이 '나'라는 소년의 1인칭 관점에서 서술되어 그런지는 몰라도, 방임주의를 추구하다 아들을 설득하는 힘을 잃어버리는 '나'의 아버지나, 마르트와 '나'의 정사 중 소리를 지인에게 들려줄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하고 망신만 당하는 면의원을 보면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런 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소년이 보인 어리숙함을 다시 보면 차이가 눈에 띌 것이다. 작품에서 '나'는 마르트와 '나'의 사랑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정신적으로 사랑한다면 마르트는 육체적으로 사랑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가령 '나'는 그녀가 나를 위해 거짓말했다는 사실에 의미 부여하고 그것에 정신적으로 만족, 쾌감을 느낀다면, 마르트는 정열적인 육체적 교감을 통해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 말처럼, 작품에서 소위 '진도'를 빼는 것은 늘 마르트의 몫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꼭 그렇게 둘의 사랑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도가 빠진 후 더 좋아하는 건 '나'이다. 물론 '나'의 심리 묘사가 주가 되는 소설이기에 그런 면도 있겠지만, '나'가 육체적 사랑보다 정신적 사랑을 더 선호해서 진도는 늘 마르트의 몫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마르트가 진도를 빼는 역할을 매번 수행해야 했던 이유는, 그냥 '나'가 소심했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소심하다는 '나'의 소년적 특성이 마르트에게 부담을 준 것이라 보아도 되지 않을까?
소년은 결정의 경험이 부족하다. 따라서 더러 소심하다.
어른은 결정의 경험이 풍부하다. 따라서 대담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리숙하다.
우리는 「육체의 악마」를 통해 미성숙한 이들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언젠가 우리는 성숙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을까? 난 잘 모르겠다.
2. 예술에서 보여온 외도의 낭만과, 그 현실
처음 읽을 때는 알아채지 못했는데, 줄거리를 다시 살피면서 깨달은 점도 많다.
사실 외도가 공개되면 그 이들은 결론적으로 헤어진다는 게 통념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면 보통: 외도 사실 공개 → 외도를 더 진행할 수 없게 됨 → 이별 → 서로를 그리워함 (비극적 결말)이 일반적이다. 외도를 더 진행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비극이 강조되는 것이 많은 매체에서 그리는 외도이다.
「육체의 악마」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먼저 외도에 찾아오는 위기가 자세히 묘사된다, 그런데 그것부터 통념과 다르다. 외도가 공개되었음에도 외도를 더 진행하나, 각각의 사랑 외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기성이 가리키는 방향이 더 선명해지고, 자연스레 소원해진다. 다시 말해, 낭만적 외도의 통념 속에서는 이별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고 있지만, 본 작품에서는 이별하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약간 식어있는 것이다. 육체의 악마는 흔히 떠올리는 '외도의, 그리고 그 이후의 낭만성'을 부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같은 관점에서, 작품 내 외도라는 의미부여는 그들의 사랑을 강화하지 못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외도라고 그 사랑이 더 낭만적이게 되고, 상대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은 외도를 하면서도 두 사람과 또 다른 외도를 했고, 그는 순간순간 권태를 느꼈다.
나는 이 작품에서 마르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마르트라는 이름은 한 송이 꽃 같다.
처음 소설을 읽으며 마르트라는 이름이 꽃 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다음 읽을 때 그것이 어떤 꽃인지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