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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색 자전거 Feb 27. 2024

선호의 규정, 그중 '이상형'에 관하여

파편 혹은 관념, 어떻게 선호를 정의하고 있는가?

“지금 자네가 쓰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 밀란 쿤데라 作  「불멸」 중에서


이 소설을 처음 읽고, 나는 쿤데라가 스스로 자신의 소설에 대해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말한 것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뭔가 슬프게 표현했다고 말할 만한 부분도 없을 뿐더러, 흔히 말하는 신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불멸」 후기를 좀 찾아보았었다. 그 후기에서는, 가장 슬픈 부분이 소설의 다음 내용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일생을 통해 그를 위해 바다가 돼준 유일한 여인이었다; 바다였던 유일한 여인이었다.


작중 폴은 바다와 같은 여자를 사랑한다. 이것이 가장 슬픈 부분이라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선호, 그 안에서 좀 더 국한하여 이상형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위의 「불멸」 속 내용을 소개한 이유는, 내가 지금 소개할 이상형과 선호에 대한 조금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 후, 가장 먼저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던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과거 난 야망, 야심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다.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중요한 것은, 언젠가 그 단어를 좋아하는 것과 비슷하게, 이런 단어를 내뱉는 이 또한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이렇게 구성된 내 이상형을 어느 정도 말로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야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조건은 '나'의 이상형을 정의하는 데 있어 적절하다. 나와 연관되어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나의 존재로 구체화되며 반대로 내가 없다면 구체화될 수 없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존재가 어떤 미지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서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그 미지의 삶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다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사랑이 생겨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이며, 사랑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 내가 정의한 이상형은 바로 그런 '프루스트의 말씀'에도 부합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런 정의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나는 문득, 내 이상형은 많은 사람을 만나, 눈, 귀, 피부 따위의 감각 기관으로 얻은 데이터를 통해 파편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두뇌라는 컨트롤 타워가 '독단적으로' 직관을 통해 정의 내린 것이라는 상념이 들었다. 나는 전자의 파편적 이상형이 일반적인 이상형의 구축 과정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간주해 왔다. 어떤 사람을 만났더니 그 사람의 어느 부분이 좋았고 어느 부분이 별로였는지 내 머릿속에 각인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 또 그것이 각인된다. 이런 과정을 일종의 피드백처럼 반복하며 로그가 남듯 이상형이 구체화되는 것이, 이상형의 자연스러운 구축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랬듯, 나는 이상형이 나처럼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흥미로운 질문들이 생긴다. 첫 번째는 '이것은 일반적일까?'이고, 두 번째는 '각각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이상형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다를까?'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자. 이런 방식의 이상형 구축은 일반적일까? 사실 난,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가와 별개로, 이상형을 이렇게 정의 내리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이상형에 관해 묻는다면, 구체적인 외모 등 특성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나열하는 사람도 물론 많은 반면, 어떤 관념을 통해 그것을 은유하는 사람 또한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상형을 다이아몬드나 자수정과 같은 보석에 은유하는 이를 본 적이 있지 않은가? 혹은 파리나 모스크바 같은 도시, 한강과 같은 지형에 은유하는 이를 본 적 있지는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비슷한 예시를 찾아보겠다. 등장인물 '스완'은 집안 분위기나 당시 사교게 정서와 맞지 않는 화류계 여성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때, 사실 스완은 오데트를 처음 만날 때부터 사랑하게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탈리아 화가 보티첼리의 그림에 나오는 여인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은유하는 이들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상형에 대한 정의를 이끌어냈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 속에 어느 정도의 '비약'을 거쳐 자신의 은유에 대입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기 위해, 자신이 데이터로 정의한 이상형들이 종합되어 '자수정'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자, 이제 그 내부를 살펴보자. 먼저, 데이터를 기반으로 나온 특성들이 꼭 자수정으로 압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웃긴 말이지만 어쩌면 보라돌이로 압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굳이 자수정으로 압축된 것은 보라돌이보다 자수정이 자신의 이상형을 대표하는 매개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수정과 반하는, 하지만 그 본인도 매력적인 은유를 포기할 만큼 관철하고 싶지는 않은 특성은 제쳐두었을 수도 있다. 즉, 은유로 자신의 이상형을 말하는 이들은 모두, 어느 정도 두뇌의 직관적 독단이 개입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이상형을 은유로 정의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통해 이런 이상형의 직관적 정의가 희소하지는 않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이제 이를 관념적 이상형이라, 앞서 말했던 단순 나열 방식의 이상형을 파편적 이상형이라 부르겠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각각의 이상형의 영향은 어떻게 다를까? 사실, 난 파편적 이상형은 인생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생각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형이 자신의 머릿속에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는 형태가 아니고, 따라서 무겁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짐'이 되지도 못한다. 


짐이 되지 못한다고? 이 말은, 어떤 이를 만날 때 그런 파편화된 자신의 이상형과 그를 대조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수행해도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의사결정을 막거나 부추기는 무언가로 작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문단에서 짐과 무거움은 결코 나쁜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인생에서 부여할 수 있는 의미는 모두 바로 이런 일종의 '무거움'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여되는 무거움 또는 짐은 축복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관념적 이상형은 파편적 이상형과 이런 관점에서 다르다. 충분히 간단하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이를 대조해 볼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되며, 따라서 누구를 만나든 따라붙는 자신의 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둘의 직접적인 비교는 이 정도로 마치겠다. 다만 나는 첫 번째 질문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통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더 확장해보고 싶다.


질문을 해보자.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이번엔 시간을 적당히 주겠다. 놀랍게도, 이 상황에서는 은유를 통해 답하는 경향이 커진다. 만약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이 이상형에 관한 질문을 받고 즉각 은유로 설명한다면, "아니, '준비'하신 것처럼 말하시네요?"라고 말하는 진행자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 구축된 이상형을 가지고 있는지 그 차이는 선천적 성향에 의한 차이라기보다는, 그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보통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은유로 압축한 답을 도출한다.


그런데, 앞서, 이상형을 직관적으로 구축하는 동안 어떤 특성은 제쳐두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첫 번째 질문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준비하기 전 자신이 생각해 두었던 파편적 이상형은 자신의 이상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 과정을 거쳐 실체화된 것은 그 후 완전히 자신의 이상형으로 자리 잡아, 압축을 위해 잠시 제쳐두었던 소중한 특성 몇 가지는 마치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특성에 대해 재고한 것(가령, "내가 정말 그녀의 '새침한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가?")이 아니라 그저 압축을 위한 생략인 것인데, 자신이 인지하는 이상형이 변하는 것이다. 사랑을 준비하는 것이고, 본인이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인데, 그 대상이 아니라 매개에 집중을 하게 된다니. 이런 왜곡은 어떻게 보면, 관념적 이상형을 가진 사람은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상형을 구성하는 관념을 사랑하는 거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나아가 이상형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곧 관념적 이상형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파편적 이상형을 직관적, 독단적으로 재구축한 관념적 이상형은 인생,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랑에 의미를 부여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전체 파편 중 일부를 잃어버리고, 또한 그 과정은 우리를 이상형에 부합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형을 구성하는 관념을 사랑하도록 한다.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으로 나는 「불멸」을 마침내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가 쿤데라는 이 책이 자신이 써본 글 중 가장 슬픈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난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바다와 같은 여자, 바다가 되어줄 여자를 사랑한다는 폴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음을. 


* 표지 그림은 민음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의 표지 문양을 사용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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