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 편에서 살아 돌아온 곡의 이야기-

휘성 & 태빈 "Sorrow"

by 송백경

2003년 여름이 막 시작하려 할 때쯤 내일모레 잡혀있는 일본에서의 단체 미팅에 참석하려고 나는 거울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착장 세트를 3벌 정도 준비하고 있었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이야.

그 당시의 내 일본어 실력은 지금에 비해 한참 모자란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성을 상대로 날 어필하는 류의 일본어는 자주 잘 쓰던 시기였단 말이야.

그래서 이루봉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일본어를 구사해야 내가 "카와이~뱃쿙짱"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지 나만의 필승전략들이 나름 있었지.

내 일본어 능력을 약 20퍼센트 일부러 줄여 능숙함을 약간 덜어내면 나에 대한 이루봉 여자의 모성본능 자극을 더 끌어올릴 수 있게 돼.

(이를테면 옥수수는 일본어로 "토우모로코시"라고 하는데 아직 말이 완숙하지 않은 일본 어린이들은 저 옥수수를 뜻하는 "토우모로코시"를 자주 "토우모코로시"라고 잘못 말한단 말이야. 나 역시 귀여운 표정을 지어가며 토우모코로시라고 말하면 "카와이 뱃쿙킁"~뭐 이런 식이야. 22~23살 시절이야. 지금은 안그래. )

그럼 난 이루봉 여자들 틈에서

"카와이~우케르~ 네네 뱃키(내 애칭) 모시 카조뇨 이루노" (귀여워~아 웃겨^^ 저기 백경 혹시 여자친구 있어?) 이런 관심을 80퍼센트의 성공률로 얻었지.

공부를 빙자한 이루봉 여자 꼬시기를 위해 난 도쿄 이루봉 여자 공습 작전을 위해 자주 일본을 넘나들었어.

자~하룻밤 자고 짐도 싸고 드디어 내일 출발이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현석형한테 전화가 오네.

"야 내가 지금 이거 아카펠라 파일 뭐 하나 보낼 테니깐 내일 까지 편곡 마쳐서 나한테 갖고 와~! 시간 넘기면 죽어" 뚝~

곡에 대한 설명도, 장르도 누가 썼는지도 누가 부르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데 다짜고짜 편곡을 해오라니...

그리고 아... 씨발 내일 이루봉여자들이랑 만나서 도쿄에서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게임도 하기로 했는데...

잡친 기분으로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어.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라는 심정으로 파일을 들어보니 원타임 대니랑 휘성이가 서로 성대에 후까시 잔뜩 부여잡고 노래 하나를 불러뒀더라고.

그럼 어디 대니 솔로앨범이나 휘성이 앨범에 수록되겠구먼.

곧 작업을 시작했어.

"빨리 해치우고 이루봉여자들 만나러 가야 돼" 오직 이 생각뿐.

이제 편곡을 시작해야 할 타임이야.

잠깐 그전에 먼저 이야기해두고 싶은 게 있어.

나는 매우 부끄럽지만 화성학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없어. 음악을 하는 사람이 정말 수치스럽게 여겨할 것이 바로 "악보를 못 본다는 점"인데...

나 역시 그래. 너무 부끄러운 사실이야. 하지만 상대방이 악보를 못 본다고 해서 절대 얕잡아보거나 하지 않아.

(내 대학시절 때가 갑자기 생각나네. 어떤 수업시간 때 내가 스스로 만들어간 자작곡에 대해 앞에 나와 학생들과 함께 듣고 곡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갑자기 그 교수님이 내 노래의 멜로디를 칠판에 대고 악보로 그려보라고 주문하더라고. 그런 나는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결국 개망신당했지 ㅋㅋㅋ)

자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부류에 대한 비판이야.

악보를 못 보는 걸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떠벌리는 사람이 있어. 내용인즉슨 인생 밑바닥부터 시작해 안 해본 게 없을 만큼 거칠게 살아왔는데 악보를 못 보는데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인생의 성공을 일궈냈다는 식의 자화자찬.

"악보를 못 본다"라는 저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어 그런데도 음악으로 성공할 건 다했네"라는 후술 표현에 마침 드라마적 반전효과를 더하기 위해 갖다 붙인 유치한 수식 행위일 뿐이야..

한국말을 한국인처럼 유창하게 잘하시는 90대 노파 어르신은 한국말 구사는 하시지만 한글을 못 읽는 까막눈이실 수 있어.

그와 마찬가지로 노래를 잘하고 랩도 잘하는 음악 하는 사람이 악보를 못 볼 수도 있는 거야.

못 보는 걸 얕잡아보거나 무시하는 게 아냐.

모르면 겸손한 태도여야지 득의양양한 태도로 모른다는 걸 자랑하듯 어필하는 건 너무 병신 같아 보인다는 거야.

악보를 못 본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위대한 대중음악가가 되었다고 본인입으로 스스로를 찬양하고 싶나 본데 참 꼴사납고 그 얕은 수가 다 보여서 좆같아.

그런 걸 이용해서 본인 이미지에 천재의 모습을 한 꺼풀 덮어씌우고 싶나 본데 "쟤는 얼마나 나태하고 게으를까?" 하는 생각만 들어.

조금만 노력하고 공부하면 악보 따위 읽는 거 금방 배울 수 있을 텐데...

90대 노파 어르신도 자신이 까막눈이라는 게 부끄러워 그 나이 되셔도 열심히 한글을 배워 깨우치는 마당에...

"저 악보 볼 줄 몰라요"라는 걸 내세우듯 말하는 애들 보면? ㅋㅋ 난 무조건 거르지.

아까도 밝혔듯이 나도 악보를 못 봐. 그런데 난 이게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누가 먼저 묻지 않는 이상 말 안 해.

악보를 못 보는데 어떻게 음악을 해요?라고 누군가가 내게 물으면 한글을 모르는 까막눈인데 한국어를 어떻게 하나요? 이렇게 답해드려.

그럼 이해하시더라고.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나는 악보를 못 보는 사람이지만 그에 비해서는 확실히 좋은 귀를 가지고 있긴 해.

코드나 화성학을 정식으로 책 펴놓고 누구에게 가르침을 전수받은 적은 없지만 어떤 음악을 듣고 이 코드를 따라 쳐보라고 하면 내 귀는 그걸 기가 막히게 분석해서 어렵지 않게 따라치게 돼.

물론 라이브연주용이 아니기 때문에 즉석연주는 불가능해. 어디까지나 편곡용 스킬일 뿐이지.

휘성이랑 태빈 노래 편곡 이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우선 그냥 무작정 일단 시작했어.

기존의 훌륭한 R&B뮤지션의 코드 보이싱도 찾아 들어보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사운드를 흉내 내어 킥 스네어 소리도 만들어 두고.

밑그림이 대충 완성되고 건반으로 코드를 하나하나 짚어가니 어느덧 슬슬 완성되더라고.

근데 난제를 하나 맞닥뜨렸어. 어떤 한 부분 때문에 끝을 못 내고 있었거든. 이 곡의 브리지 부분에서 휘성이 절규에 가까운 애드립을 치는 파트에서 도저히 도무지 그 딱 한 마디에 걸맞은 코드를 못 찾겠는 거야.

수학적으로 계산도 안되고 어떤 코드를 넣어야 할지 계속 망설이기만 할 뿐이었지.

그 한마디 코드를 못 짚는 게 내 음악적 수준의 낮음을 증명하는 거야 결국.

고민 끝에 집 근처에 사는 포스티노(이준호 작곡가)라는 친구에게 찾아갔어. 그 친구에게 전체적 음악을 들려주고 나서 이 빈 부분을 과연 무슨 코드로 채워야지 뻔하지 않으면서 버터냄새를 느낄 수 있을까 조언을 구했더니

포스티노 曰 "백경아 이 부분 코드를 네가 좀 특이하게 짚었으니 클라이막스 넘어가는 부분에서 여기 한마디를 이렇게 바꿔서 넘어가면 어떨까 "

역시 포스티노는 음악가 집안 출신답게 음악적 화성학적으로 해박한 지식을 가진 터라 곧바로 명쾌한 해답을 내게 주었어.

자 난제였던 부분이 풀리고 난 후부터는 그냥 컨트롤 C, V였고 그렇데 열심히 편곡 작업을 마쳤는데.

아뿔싸 정신을 차려보니 "이루봉여자들"과의 "마시자" 놀기로 한 시점이 한참 지나버렸네.ㅜㅠ

내 귀에 아른거리는 이루봉여자애들의
"벳쿙짱 카와이, 벳키 다이스킹" 이 모든 것들이 다 허공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려 아쉬움에 한숨만 푹푹 쉬어졌지...

꿩대신 닭이라고 2달쯤 후 개 더운 미친 여름 어느 날.

이효리랑 이수영이랑 이기찬, 나 이렇게 네 명이서 도쿄로 2박 3일 여행하고 온 걸로 만족 삼았지.

하라주쿠인가 이케부쿠로인가 암튼 어떤 동네에 있던 가라오케 술집에서 술이나 잔뜩 쳐마시고 노래나 부르다 그냥 한국에 돌아왔어.

그리고 내 일본여행계획을 다 망친 대니와 휘성의 음악은 곧 내 뇌리에서 사라졌어.

어디에 쓸지 쓰일지 난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이야.
곡제목도 모르고 누가 작사 작곡했는지도 모른 채.

이듬해 2004년쯤? 원타임 대니가 본인 한글이름인 "태빈"으로 1집을 냈어. "내가 눈을 감는 이유"가 타이틀 곡이었고. 근데 그것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어.

나는 태빈 앨범에 실린 원타임 3집 수록실패곡 "서로가 서로를"이라는 내 자작곡을 너무 싫어했거든.

리듬다이에 섞은 물방울 소리가 정말 너무 싫어서 지금도 난 그 버전을 안 들어.

하여 태빈 솔로 앨범에 관심이 없던 나는 그 앨범에 어떤 곡이 실렸는지도 당연히 알지 못했어.

그러고 나서 21년이 흘렸어.

나는 어느덧 이 컴퓨터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해서 기존 발매된 AR곡에서 가수의 아카펠라 파일만을 뽑아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지.

오~그래?라는 생각에 난 그 기술을 이용해 기존에 있던 원타임 노래 중 대니 목소리만 아카펠라로 뽑아 새로 편곡해서 BK표 리믹스를 만들어볼까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어

그러한 의도로 열심히 검색하던 와중에.... 21년 동안 아예 잊고 있던... 내 소중한 일본여행계획을 망치로 철저히 때려 부순...
그 곡이 딱 하고 나오는 거야.

제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Taebin "Sorrow" feat 휘성...

아 몰랐는데 이 곡이 2004년도 태빈 솔로 앨범에 수록됐었었나 보구나 이렇게 짐작했지. 그럼 작곡은 누가 했지? 궁금한 마음에 태빈 솔로 앨범을 검색했는데 응? 거기에 실린 적이 없어.

어? 뭐야? 그럼 휘성이 앨범인가? 해서 그쪽도 다 뒤져봤는데 휘성이 앨범에도 수록된 적이 없는 거야.

그리고 구글에서도 곡의 정보, 내용이 검색이 안돼.

유튜브에서는 단 한 개의 컨텐츠로 검색은 되는데 무려 15년 전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이 곡을 업로드했어. 그 검색 결과만 유일하게 보여. 발매한 적도 없는 이 음악을 누가 무슨 권한으로 업로드한 걸까? 그 누군가는 진짜 과연 누굴까?

작곡자 작사자는 누군지 알 수 없고 노래가 어디에 쓰였는지도 알 수 없어. 시간이 22년이나 흘러 이 노래를 편곡했다고 하는 장본인인 나만 여기 딱 나타났어.

귀신에 홀린 느낌이야.

이 곡의 운명은 대체 뭐였던 거야? 성대 후까시 잔뜩 잡아놓고 휘성과 대니가 이렇게도 잘 불러놨는데 왜 작곡자 이름도 검색이 안되지?

아까도 말했지만 편곡은 내가 했으니 송백경이야. 이거 하나만 밝혀진 채 의문만 잔뜩 남아있어.

자 들어봐 이제...

(그런데 계속 들어보니 왠지 작사가 故휘성일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일 뿐이야)


곧 얼마 지나면 다가올 휘성의 1주기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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