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긴 휴가를 갔던 게 언제였었나. 아마 내가 최장으로 긴 휴가를 갔던 건 2019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이맘때, 11월에 갔었고 행선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인 태국 치앙마이였다. 팬더믹과 개인적인 일 때문에 작년에는 그 어디에도 가지 않았고 올해는 국내 여행으로 눈을 돌렸다. 난생처음 간 제주도에서 일주일 조금 넘게 있는다고 말했을 때 주변에서는 두 가지 이유로 놀라워했다. 첫 번째는 제주에 처음으로 가본다는 사실, 두 번째는 ~~ 살기 할 것도 아닌데 혼자서 여행으로 그렇게 갈 수 있냐는 이유였다. 아마 두 번째 이유에는 내 상황 상 그렇게 길게 휴가가 가능하냐는 의문도 함축되어 있었다. 사실 하반기에 예산안 작업이 끝나고 나면 제주에 갈 거라는 막연한 계획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길게 휴가를 갈 수 있었던 것에는 나의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 덕분이었다.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극에 달했던 9월 말, 분노와 함께 비행기 표를 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제주행이 결정됐고 숙소 예약은 한 달 전쯤 했지만 그 외에 준비는 딱히 하지 않았고 수많은 일들을 뒤로한 채 날짜가 되자 일단 제주로 떠났었다.
제주는, 좋았다. 차도 없이 뚜벅이 여행인데 가서 뭘 할 거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냥 쉬러 간다고 답했고 이건 정말 진심이었다.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면허를 땄다고 하기도 민망하게 장롱면허를 고수하고 있는 나는 애초에 제주에 간다고 해서 차를 렌트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내 목적은 단 하나, 분위기 환기였다. 올해 회사에 살다시피 일에 모든 신경을 쏟아부으면서 나 스스로가 많이 낡고 지쳤으며 아주 해묵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퀴퀴하게 부정적인 냄새가 나는 커다란 무언가가 되어가는 느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일에 쏠리는 신경과 갈수록 예민해지는 신경 줄, 짜 맞춘 것처럼 덩달아 급속도로 나빠지는 건강. 갈수록 몸도 마음도 무거워져서 서서히 침잠하는 느낌. 그래서 어디라도 좋으니까 이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다. 비행기를 타고 물을 건너야 올 수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주는 다른 국내의 도시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마 공항에서부터 볼 수 있는 야자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은 마을 마을이 비슷해 보여도 느낌과 매력이 모두 다 달랐고 늘 그렇듯 쉬고 책 읽고 걸으러 간 건데 쉬는 거 빼고는 다 충족시킨 아주 아이러니한 여행. 나는 분명 쉬러 갔는데 매일 못해도 만보는 걸었다. 왜죠? 일주일 넘게 제주에 있으면 분명 내 안의 어떤 것이 변할 것이라고, 첫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다. 그 변화는 당장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많이 채워지고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선생님 말씀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정말 이 짧은 시간으로 많은 것이 변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변화라는 건 눈에 두드러지는 특성이 아니니까 내가 눈치채고 난 다음에는 이미 많이 변화한 뒤라 그 어떤 것도 예측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제주에서 지내는 내내 선생님의 말씀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왠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나쁘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 제주에서도 아침마다 일을 좀 했다. 부서에 나 혼자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내 일을 백업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침마다 메일을 확인하고 복귀하면 팔로우업 해야 할 사항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급한 건들은 회신을 하고, 미리 메일을 보내 놓기도 했다. 휴가라서 일을 하는 게 짜증 나야 하는데 짜증 나는 감정보다는 미래의 내가 덜 고생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 않고 마음 불편히 있느니 하는 게 낫다는 감상도 있었다. 나는 어차피 눈에 들어온 건 처리해버려야 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메일을 보지 않으면 몰라도 이미 본 메일은 어느 정도 업데이트를 해둬야 마음이 편한 스타일이다. 그냥 내가 이런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니까 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휴가 후 복귀 직전의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근하기 싫다는 마음 구십 프로, 어차피 할 거면 빨리 출근해서 쌓여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해버리고 싶다는 마음 오프로 그리고 나머지는 오늘도 잘 버텨보자는 셀프 다독거림 오프로. 긴 휴가 뒤라 어쩐지 첫 출근의 기분이 든다. 물론 이 감상은 출근 후 일분 뒤면 사라질 감상일 테지만. 이대로 출근하면 나는 아무리 대강 머릿속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뒀어도 아주 많이 허덕이게 될 거다. 쌓여만 있는 업무들, 꽂혀 있는 플래그들, 예정되어 있는 미팅 한 보따리,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회신해야 할 주요 메일들. 그래도 아마도 오늘 하루가 끝날 때쯤이면 아마 휴가 직후의 출근일이라기보다는 평범하게 야근한 보통의 하루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더없이 담담해진다. 휴가는 덧 없이 짧고 내 일상은 끊임없이 연속성을 띄고 굴러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