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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04. 2023

이곳에선 인사 사절입니다

나지막한 동네 뒷산을 매일 아침 오르다 보면 가끔 낯선 이의 인사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인사를 받는 입장에서 나도 덩달아 인사를 건네면 될 것을 이상하게 그게 잘 안된다. 입이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잘 떨어지지도 않는 데다 억지로 벌려 소리를 낸 들 감정 없는 어색한 목소리만 흘러나올 뿐이다. 게다가 혼자만의 사색에 빠져 무방비 상태로 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인사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인사에 당황해하는 사이 상대는 자기 할 말만 하고는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렇다고 남의 인사를 날름 공짜로 받아먹을 순 없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여 한 박자 느린 행동을 취하면 뒤통수에 대고 인사하는 볼 쌍 사나운 경우도 간혹 생긴다. 결국 인사를 건네오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대신 빠르게 묵례로 답하는 걸 나름의 규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 인사가 꽤나 부담스럽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용하는 아파트 승강기에서 낯선 이웃들과 별 의미 없이 나누는 인사와는 또 다르다. 사실 승강기도 혼자 이용할 때가 제일 편하긴 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좁은 공간에서 낯선 사람과 함께일 때 흐르는 정막감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특히 낯가림이 심한 나에겐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같은 낯설음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같은 아파트 라인에 거주하는 입주민이란 꽤나 믿음직한 신분의 범위가 주어진다. 또한 지극히 형식적이고 예의적인 그 인사의 의도 역시 누구나 짐작 가능하다. 심지어 승강기 문이 열리는 순간 인사를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가 수시로 오가는 나지막한 동네 뒷산에서 누군가 훅 건네오는 인사는 모든 면에서 예측 불가하다.



몇 년째 매일 같은 시간에 산을 오르기에 시간대가 비슷한 사람들은 대충 안면이 있다. 그러나 그 안면이란 게 굳이 얼굴을 뜻하는 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기에 얼굴은 오히려 잘 알지 못한다. 그저 특징 있는 목소리, 걸음걸이, 머리 염색 색상, 눈에 띄는 모자나 가방 아님 동행하는 애완견 등등을 통해 인식하는 것뿐이다. 그곳을 벗어나게 되면 누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만나서 반갑지도 못 봐서 서운하지도 않은 그저 숲의 한 풍경에 머물려 있는 사람들이다. 좁은 길을 내어주거나 도움을 줘야 하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모두를 그저 숲의 일부로 여기며 신경 쓰지 않고 산책하는 게 제일 편하다. 무엇보다 산 둘레길을 걷는 한 시간 동안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세상에 빠져 걷고 싶다. 가끔 사람들에게 시선이 머무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내 의식이 흐르는 대로 가만 놔두고 싶다. 가끔 건네오는 인사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도 그 흐름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인사를 건네오면 그냥 받아주면 되지 뭘 그리 예민하게 반응하냐 할지 모르지만 변명이 아니라 아침 일찍 이곳을 찾는 대다수의 사람들 역시 다 비슷한 모습이다. 주위엔 별 관심 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산책이나 운동에 집중한다. 울퉁불퉁한 산 길을 맨 발로 조심스레 걷는 사람은 온 감각을 발바닥에 집중하고 있는 중이고 이어폰을 끼고 무언가 듣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귀에 흘러들어 가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멍 때리는 듯한 표정은 지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음을 나타내고 심각해 보이는 듯한 얼굴은 골똘히 생각해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특별히 무례해서가 아니다. 사실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이른 아침부터 낯선 나를 인사로 반겨주는 건 참 고마운 일이지만 속마음은 예의 바른 무관심으로 없는 듯 대해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나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산에서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인사를 받는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 번째 유형은 건네는 인사를 못 들은 척 그냥 무시하고 가는 사람들이다.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내가 오히려 더 무안해진다. 두 번째는 나처럼 가벼운 묵례로 답하는 경우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소리를 내어 답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세밀하게 따지면 두 가지로 나뉜다. 받은 인사말을 아무런 감정 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높은 호응도로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는 사람도 있다.




"안녕하세요"

오르막 구간을 헉헉 거리며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내 앞에 내려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혹시나 해서 돌아보니 한참 뒤에서 한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 올라오고 있다. 대부분 인사는 마주칠 때나 하지 이렇게 뒤에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 발길을 붙잡진 않는다. 그렇다고 뒤를 보고 묵례는 할 수없어 나 역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몇 바퀴째입니까?"

언제 봤다고 그런 걸 묻지?

"저는 지금 막 와서요"

"저는 벌써 2 바퀴 쨉니다"

길을 비켜주자 웃으며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오르막 구간이 끝나고 평지에 다다르자 벤치에 앉은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여기 좀 앉아 쉬었다 가요"

아까 그 남자다. 그러면서 자기 옆 자리를 손으로 두드린다. 친한 척 자꾸 말을 거는 게 좀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가볍게 웃음으로 대응하고 그냥 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20분 남짓 걸었을까 이번엔 마주 오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건넨다.

"어, 여기서 또 만나네, 나는 저쪽으로 해서 이리로 내려왔는데"

또 그 남자다. 묻지도 않은 자신의 동선을 손으로 가리키며 변명처럼 얘기한다. 살짝 당황스럽다. 뭔가 고의성마저 느껴진다. 입을 굳게 닫은 채 묵례를 건네고 얼른 그 남자 곁을 스쳐 지나간다.

"내일 봅시다. 아, 내일은 내가 안 되겠고... 목요일에 봅시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침 지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오솔길 저편에서 얼굴부터 목까지 이어진 까만 복면을 착용한 남자가 나를 향해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이곳에서 나와 친하게 아는 척할 만한 사람은 전혀 없다. 묻지 마 범죄로 대한민국이 어수선한 요즘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되돌아갈 수도 가만 서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잔뜩 경계를 한 채 조심스레 한 발씩 나아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의문의 그 남자는 복면을 내리고 나에게 뭐라 말을 건넸다.

"오, 미소가 아름다운 그대... 같이 갈까? 그래, 같이 가자"

세상에, 며칠 전 그 남자다. 얼굴은 잘 모르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 남자가 분명했다.  



반말로 친한 척 말 거는 것도 재수 없고 반대 방향에서 오던 것을 나와 같이 갈려고 걸음을 돌리는 것도 소름 끼쳤다.

"아뇨, 저는 걸음이 좀 느려서요"

달달 떨리는 심정을 숨기고 얼른 대답을 하고는 급히 그 남자 옆을 지나쳤다. 뒤에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긴 나는 벌써 3 바퀴 째니깐"



무섭고 불쾌한 마음으로 산에서 돌아와 남편에게 며칠 전부터 계속 신경 쓰이고 있었던 그 남자와의 일을 모두 얘기했다. 남편은 그런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며 혼자 다니지 말고 사람들과 무리 져 다니란다. 사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니라는 게 남편과 나의 생각이다. 좁은 오솔길이 여러 군데로 나있긴 하지만 항상 사람들이 제일 많이 지나다니는 길만을 이용하고 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누군가의 눈에 금방 띄게 된다. 그럼에도 찝찝한 맘이 자꾸 드는 건 지금보다 겨울이 걱정되어서이다. 11월 중순이 되면 아침 일찍 이곳을 찾는 사람은 확연히 줄어든다. 평소에도 인적 드문 깜깜한 겨울 숲 길을 혼자 걸어 다니는 게 사실 겁이 났었다. 이럴 땐 덩치 작은 여자인 게 너무나 속상하다. 다행히 이후 그 남자는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싫은 내색을 확실하게 했으니 더 이상 말을 건네지도 않을 테고 지난 몇 년간처럼 내 눈에 보이는 일도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내 희망에 불과한 일이었다.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뜨니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에 가는 걸 깨끗하게 단념할 만큼 그 양이 많지도 않았다. 잠깐 동안의 고민후 비옷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 후 산 중턱에 나 있는 둘레길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소강상태를 보이더니 어느 순간 다시 뿌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모자만으로 감당이 되던 것이 점점 굵어진 빗방울 탓에 결국 가방 속 비옷을 꺼내게 되었다. 좀 전까지 자주 눈에 띄던 사람들이 비가 다시 시작되자 다들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오히려 더 좋다. 사실 비 내리는 숲 속을 혼자 걷는 건 꽤 근사한 일이다. 비옷에 도닥도닥 떨어지는 빗소리도 비에 젖은 흙이 뿜어내는 짙은 숲냄새도 모두 기분 좋다. 잠시 길 옆에 서서 가방 속 물통을 꺼내 목을 축이고 있을 때였다. 우산을 쓴 누군가가 모퉁이를 돌아 내 곁에 다가오더니 갑자기 손을 내게 뻗으려고 한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고 보니 또 그 남자다.

"우산 씌워 주려고 했지"

소름이 끼친다. 이 늙은 남자는 이미 나에게 수작 부리는 데 재미를 붙였다. 아마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면 신나 하면서 더욱 집적거릴 게다.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고는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 이러다 산에서 스토킹을 당하지나 않을지 겁이 나는 동시에 한편으론 왜 이리 분한지.



집에 오자 슬프고 무서운 기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나지막한 동네 야산 둘레길 부근에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훤한 대낮에 일어난 그 일로 피해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곳은 내가 다니는 숲 길이랑 지형적으로 너무나 비슷한 곳이었다. 둘레길이 산중턱에 나있는 것도 사람들이 산책하러 많이 다닌다는 것도 모두 똑같았다.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낯선 사람의 인사를 받아준 대가치고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불안감은 너무 컸다. 4년 가까이 계속 이어온 아침 숲 산책을 그 늙은 남자 때문에 포기할 생각을 하니 너무나 화가 났다. 그를 통해 얼마나 큰 기쁨과 위안을 받아왔는데. 이대로 그냥 포기할 순 없다. 하지만 45kg도 안 나가는 내가 아침 숲 산책을 이어가기 위해선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당장 그다음 날부터 제법 굵은 나무 작대기를 하나 주워 지팡이인양 무기 삼아 짚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지팡이를 한 손에서 순식간에 양손으로 옮기는 연습도 걸으면서 간간히 한다. 평소 유유 작작 천천히 걷던 걸음은 30% 정도 속도를 올려 걷는다. 마르기 했지만 그리 호락호락 끌려갈 여자가 아니란 걸 온몸으로 나타내기 위해 눈에 힘을 주고 최대한 씩씩한 모습으로 숲 길을 다닌다. 조만간 호루라기도 하나 사서 목에 걸고 다닐 예정이다.



나름 중무장을 시작한 바로 그날 오솔길에서 그 남자와 다시  부딪히게 되었다. 마침 주위에 사람들이 있으니 평소와 달리 점잖게 인사를 건네왔다.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나무 작대기를 살짝 들어 두 손으로 옮겨 힘껏 쥐고는 그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이후 3번 정도 더 부딪혔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서인지 더 이상 내게 말을 건네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경계를 멈추지 않고 손에서 지팡이를 내려놓는 일도 삼가고 있다. 물도 주위를 살펴본 후 마신다.



정말 무섭고 슬픈 현실이다. 남보다 아침을 부지런히 시작하여 기분 좋게 산책을 즐기던 내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이젠 산책이라 말하기도 좀 애매하다. 빨리 걷는 덕분에 오히려 건강엔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더 이상 여유로운 산책을 즐길 수 없는 게 아쉽다. 이건 무슨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큰 짐승에게 쫓기는 작은 동물처럼 항상 주위를 경계해야 되는 게 너무나 속상하다. 목엔 호루라기를 걸고 손에 굵은 나무 작대기를 꼭 쥔 채 날카로운 시선을 이리저리 굴러가며 빠르게 걷는 내 모습이 참 딱하기만 하다. 물론 그 남자가 별 의도 없이 그냥 말을 건넨 것을 혼자 과민반응 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내겐 두려움과 불편함 그 자체였다.



당분간은 나뿐 아니라 모두들 주위를 잘 둘러보고 잠시도 상황인식을 게을리해선 안될 때이다. 모든 건 순식간이며 조심해서 나쁠 건 전혀 없다. 앞으로 모르는 사람이 산에서 건네는 인사에는 묵례 외의 어떤 반응도 보이지도 않을 생각이다. 혹 기분 좋게 건넨 인사에 다소 무뚝뚝한 내 반응으로 기분 상할 분들께 미리 양해의 말을 전하고 싶다.

'제가 낯가림이 심해서 그런지 겁이 많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친절한 인사는 너무나 감사한데... 앞으로 절 못 본 척 그냥 가만 내버려 두시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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