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Oct 08. 2023

기다림의 적절한 유효기간은

처음부터 그랬던 건 결코 아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반신반의하며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베란다로 달려 나가 그 생사여부부터 확인할 정도로 애지중지 여겼다. 그런 내 마음을 잘 아는 듯 별 다른 보살핌도 필요 없이 잘 자라준 무던한 아이였다. 저런 애 같으면 몇 명은 더 키우겠다 싶기까지 했다. 게다가 고맙게도 지난겨울 낯선 이국땅 베란다 추위 속에서 생애 첫 혹한기를 무사히 넘겨주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 기름기 하나 없는 척박한 토양이건만 그것도 집이라고 터로 삼아 버텨 준 모습이 마냥 기특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부쩍 불어난 몸집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 어차피 화분의 면적만큼은 그에게 허락된 공간이기에 위로 계속 올라가는 거야 상관없다지만 점점 옆으로 벌어지는 추세다. 좀 예쁘기라도 하면 키우는 맛이라도 있을 텐데 자라면서 꼭 애니깽처럼 사납게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1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지켜본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바라던 소식은 전혀 보일 기미가 없다. 눈치 없이 그저 지 몸 불리기에만 급급한 꼴을 보니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애니깽과 파인애플


저걸 그냥 폐기처분 해버려? 더 자라면 처리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닐 텐데. 지금도 성깔 있어 보이는 생김새 탓에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순간 그 날카로운 끝으로 비닐봉지를 쭉 찢어놓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명이 있는 건데 먹기 위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뽑아버리는 짓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별 뾰족한 방법도 없이 볼 때마다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작년 여름쯤 TV에서 박세리가 파인애플 키우기에 도전하는 걸 봤다.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파인애플에서 잘라낸 윗 동 부분을 물꽂이한 후 뿌리가 나오면 그냥 흙에 옮겨 심으면 된단다. 영 미더웠지만 박세리가 예전 미국에 있을 때 실제로 그렇게 키워 파인애플을 수확했다니 살짝 호기심이 생겼다. 게다가 얼마 전 어느 브런치 카페에서 화분에 파인애플이 열려 있는 신기한 광경을 직접 보기도 했다. 검색해 보니 파인애플을 키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되었다. 그렇담 나도 한번 시도해 봐? 이래 봐도 나름 식집사에 베란다 농사꾼이기도 하다. 요즘은 게을려서 잠시 손을 놓고 있지만 몇 해 전까진 상추며 겨자잎, 미나리, 열무등을 매년 베란다에서 직접 키웠다. 작년엔 수확한 바질로 페스토까지 만들었다. 마침 마트에서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상표의 파인애플을 이천 원이란 파격적인 가격으로 행사하기에 얼른 하나 집어 들었다.



칼로 파인애플의 윗 동을 싹둑 잘라낸 후 별 다른 손질 없이 그대로 물컵에 담갔다.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자 정말 뿌리가 났다. 이제껏 삽목에 실패한 다른 여러 아이들과 달리 흙에 옮겨 심고도 잘 정착해 주었다. 앞으로 1년만 기다리면 파인애플이 열릴 생각에 뿌듯했다. 그래 딱 1년. 누가 알려 준 것도 정해준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럴 것 같았다. 파인애플의 고향에선 벼농사도 이모작, 삼모작을 하는데 죽지만 않는다면 그 정도의 기다림으로 충분할 거라 여겼다.



그렇게 시작된 저 아이와의 인연은 올봄까진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이제 힘들었던 겨울도 다 지나갔고 곧 여름이 올 것이다. 이곳의 여름도 그리 만만치 않다. 햇빛 잘 드는 남향 베란다의 온도는 아마 고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조만간 잎 한가운데서 아기 파인애플이 짜잔 하고 올라올 거고 계절의 끝자락쯤엔 비록 제대로이진 못해도 직접 키운 파인애플을 맛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혼자만의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봄이 가고 유달리 뜨겁던 여름마저 다 가버린 지금 어찌 된 게 잎사귀만 계속해서 새로 고 있다. 수시로 들여다 보건만 잉태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팔다리를 얼마나 옆으로 뻗어 재끼는지 그 옆엔 함부로 다가서지도 못한다. 혹시 메이커 브랜드아닌 탓에 부실한 건 아닌지 그 태생에까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나저나 이대로는 아니다. 이사를 계획하고 있어 기르던 화분들도 조금씩 정리를 할까 생각하던 차다. 더 이상 하염없는 기다림에 목메고 있을 순 없다.



첫 겨울을 지나고 났을때에 비해 지금은 폭풍성장하여 잎만 무성하다


그런데 뭔지 모를 미련과 찝찝함이 날 붙잡는다. 몹쓸 놈의 끈끈한 정 때문만은 아니다. 자그마치 1년 하고도 3개월을 기다려왔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바라던 바를 얻게 되는데 그걸 못 참아 모든 걸 허사로 만들어 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앞선다. 도대체 이 기다림의 적절한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지 짐작이라도 해야 이든 저든 빨리 결정을 내릴 것이다. 얼른 검색창에 '파인애플 키우기'를 입력해 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조용히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아이에게 순간 미안해진다. 너무 성급했다. 찬찬히 후기들을 읽어보니 보통 2년 반에서 3년은 지나야 귀여운 아기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이면 애초 시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의욕만 앞서 시작한 내 잘못이다. 그래도 무식한 탓에 기나긴 기다림의 절반을 섣부른 기대로 그리 지루하지 않게 보냈다. 성급히 뽑아 버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저 아이에 대한 내 기다림의 유효기간은 3년으로 정했다. 그 시간이 지나고도 달라진 게 없다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파인애플 키우기처럼 검색창에 입력만 하면 그 기다림의 적절한 유효시간을 알려주는 일들만 내 인생에 있음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적어도 내 마음의 방 하나를 미련이란 녀석이 통째로 차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조금만 더 그 누군가를, 그 무엇을 참고 기다렸더라면 지금 내 삶이 많이 달라져 있을까?



생전 내가 키우는 화분에 관심 1도 없는 남편이 베란다에서 무언가를 한참 바라보더니 뜬금없는 소릴 내게 던진다.

"파인애플 이거 잎만 계속해서 나는데 갖다 버려야 하는 거 아냐?"

순간 피식 웃음이 난다. 며칠 전 내가 생각했던 거와 어쩜 그리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그래서 부부가 되었을까. 저 아저씨야말로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20여 년 전 그때 과감한 결정을 내렸어야 했는데 뭐 때문에 유효기간을 연장해 가지고 여태 맘고생하고 살고 있는지. 지금 저 아이와 당시 남편의 운명이 다 내가 정한 기다림의 유효기간에 달린 것 같아 조금 어깨가 무거워진다.

"검색해 보니 2년 반에서 3년은 돼야 열매가 올라온대"

더 데리고 있겠단 함축적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은 남편은 별 다른 대꾸 없이 베란다 문을 닫고 돌아선다.



매거진의 이전글 듣고 싶은 소리가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