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한 모임에서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생겼다. 그런 관계가 야기시키는 온갖 불편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 잘 알기에 몹시 속상하다. 애초 그런 관계를 만들지 않았음 좋았겠지만 매사 부족한 탓에 어찌 그리 돼버렸다.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대가 날 탐탁지 않게 여기는 걸 일찍 감치 느낄 수 있었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누군가 좋으면 굳이 이유가 필요 없듯이 반대로 싫으면 오만가지가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싫다는 사람에게 나라고 좋은 감정이 들리 없다. 갈수록 노골적인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무례한 행동을 보면 사실 몹시 불쾌하다. 나 역시 그리 관대한 사람은 아니기에 날을 세우게 된다. 이젠 추잡스럽게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심사를 틀어놓고 있다.
모임이 결성되고 세 번째 만남에서부터 나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 모임을 만든 주체가 바로 우리 둘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잘 지내고 싶었고 그리 하기로 얘기까지 했었다. 때때로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의논하면 서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뭔가 대단한 취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지속적인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소모임이다. 도대체 뭐가 불만인지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 썩 내키진 않았지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본인의 개인적인 의견을 마치 모두의 의견인양 날 생각하는 투로 말할 때 이미 모든 걸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하는 얘기가 정말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같은 모임의 A에게 당시 내가 모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혹 실수한 건 없는지 슬쩍 떠보았다. 참 이상하게도 같은 행동에 대해 전혀 다른 얘기를 한다. 도움이 많이 되어 고맙다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가르쳐 달란다.
내 안의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끊임없이 다투며 날 설득시키려 하고 있다.
'너가 잘난 척을 했겠지. 그래봤자 얼마나 잘한다고. 그리고 어차피 모임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건 그 사람이잖아. 너는 그냥 가만 앉아 입만 떠들어댔으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까워 보일 수도 있지'
'무슨 소리야, 모든 걸 구상하고 그 사람에게 이런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너잖아.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저 사람 너한테 샘이 나서 심통 부리는 것 같은데. 니가 뭘 주도해서 하면 혼자 뚱해있는 거 여러 번 봤잖아'
세상 참 피곤하게 혼자 별의별 시나리오를 다 쓰고 있다.
이 모임과 연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지 벌써 몇 달째 고민 중이다. 보다 즐겁고 재밌게 살기 위해 만든 모임인데 그 의도와 달리 매번 모임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계속 찝찝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당연히 이젠 모임에 나가는 것도 과제를 하는 것도 더 이상 즐겁지 않다. 작년 이 모임으로 인해 새로운 삶의 활력소를 찾아 다소 들떠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고 식었던 몸뚱아리가 이 모임으로 다시 뜨거워졌다느니 어쩌느니 그 앞에서 열심히 떠들어댔으니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모임의 대부분도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 있다. 결국 얼마 전엔 A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괜스레 격려의 말을 건네주며 그 사람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했다. 날 달래려 그냥 하는 소린지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내 마음을 알아주는 듯한 A가 눈물이 나게 고마웠다. 순간 너무 흥분하여 그만 내 안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말았다.
그간의 억울함이 봇물 터지듯 주착 맞은 입을 통해서 빠르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속 시원함도 잠깐 이내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너그럽지 못하여 누군가와 트러블을 만든다는 게 부끄럽고 창피스럽다. 나는 또 뭐가 그리 잘나서 그 사람을 탓하는지 한없이 못나 보인다. A 역시 그저 따뜻한 말로 토닥여주고자 했을 뿐 더 이상의 소리는 듣고 싶진 않았을 테다. 오직 나에게만 적개심을 내보일 뿐 다른 이들에겐 잘하는 그 사람에 대해 A가 달리 불만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본인 일도 아닌데 추잡스런 분쟁에 끼어들 이유도 없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속딱지가 그 사람으로 인한 화로 벌겋게 달아있지만 A에게 할 소리는 아니었다. 다음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곧 깨닫기 시작했다. 스스로에 대한 멸시적인 자기 비하로 통화를 마무리 지어야 조금이나마 맘이 편할 것 같았다. 나라는 인간이 참 얼마나 가식적이고 계산적인지. 하지만 솔직한 마음이기도 했다. 크기가 다소 작긴 하지만 내 안에서 들려오는 날 나무라는 소리였다.
내 말을 다 들은 A가 드디어 입을 연다.
"그래, 자기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겠지"
일단 나의 자아비판에 부정은 하지 않는다. 살짝 서운한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어진 A의 말이 꽁꽁 언 내 마음을 사르르 녹여준다.
"그런 단점이 있다고 해도 자기에겐 그보다 훨씬 많은 장점이 있다는 건 알아둬"
이후 모임에서 그 사람으로부터 또다시 날 무시하는 듯한 소릴 듣고 나니 이젠 진짜 모임에서 발을 뺄 시간이 되었음이 느껴졌다. 개인적인 일로 더 이상 여러분과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는 점잖은 인사말과 함께 쿨한 퇴장을 맘속에 그리며 다음 모임에 참석했다. 며칠 전 A와의 전화 통화에서 있었던 그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라 단단히 마음먹은 터였다. 그러나 세상사 내 각본대로 쓰이지는 않는 법 기어이 사단이 벌어졌다.
더 이상 참지 못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목청을 높이는 볼쌍사나운 모습을 모두에게 보이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땐가 반 친구들 앞에서 한 친구가 싸운 이후 도대체 얼마 만에 남들에게 싸움판을 구경시켜 주는 건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음 그냥 뒤에서 구시렁거리고 말지 직접 대면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따지고 싸우는 건 교양 있는 척하고 싶은 나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용히 몇 가닥 안 남은 인연의 끈을 툭 끊어버리면 될 것을 결국 남들 앞에 보여서는 안 될 흉측한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눈에 불꽃을 튀어가며 한마디도 안 지려 바락바락 말을 이어가지만 부끄럽다기보단 어찌 된 게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이 먼저다. 그릇도 안되는데 괜히 똥폼이나 잡아가며 고상한 척 말하는 것보다 그동안 속에 쌓여 있던 불만들을 그냥 따지고 퍼붓고 나니 뭔가 개운하다. 게다가 그동안 설마 했던 그 사람의 진짜 속내를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알게 된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지저분한 싸움판에서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건 그 사람과 나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둘은 단순해져 서로 탓이나 하고 있지만 가만 보니 다른 이들은 각자의 셈으로 이 분쟁을 서둘려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모임에서 나름 꼭 필요한 둘이었기에 누구 한 명이라도 빠지면 불편해지는 건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된다.
그 난장판이 벌어지고 며칠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의 잘잘못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큰 소리로 싸우고 묵은 감정을 다 토해놓고 나니 모든 게 한 발 물러나 보이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실제적인 대표가 되어 모두를 잘 이끌어 가고 싶어 했고 실제적으로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별 신경 쓸 일 없이 모임에 편하게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같이 모임을 시작했으니 뭐든 함께 의논하길 원했고 우리 중 내가 제일 실력이 나으니깐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떠들었을 뿐인데 그게 처음부터 자기 눈엔 거슬렸던 게다. 어쩜 다른 사람들 말대로 둘 다 모임에 너무 열성적이라 벌어진 일일 것이다.
결국 그날의 모임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여전히 이 모임을 계속해야 되는지 고민 중이다. A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 볼 면목도 사실 없다. 하지만 일말의 내숭도 없이 원초적인 내 속내를 다 까발린 이후 크게 깨달은 바가 하나 있다. 물론 자주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지만 지속적으로 한 번씩 불쑥 떠올라 내 속을 확 뒤집어 놓는 요놈의 화병을 예방하기엔 아주 훌륭한 방법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