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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14. 2024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

가을로 접어들 쯤이면 이미 기억 속 저편이 돼버리곤 하지만 새해가 되면 매번 야심 찬 목표를 찾아 세웠다. 철저한 계획형 인간답게 1년 동안 꼭 이루고자 하는 일들을 새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는다. 아직 텅 비워 있는 수첩을 결연한 표정으로 넘겨보며 이제부터 이 공간들을 열심히 또 채워나가자 스스로를 독려한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새해가 주는 의미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뿐이다. 매일매일이 새로운 하루인데 무언가 결심했다면 새해까지 미루지 않고 당장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올 해는 살짝 변덕을 부려 '50권의 책 읽기'란 작은 목표를 세우고 도전 중에 있다. 어떤 계기로 그런 목표를 세울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무식한 내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들어 절박한 심정으로 독서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9월에 접어든 지금 다행히 그 프로젝트는 순항 중이다. 37번째와 38번째의 책이 동시에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50권의 책을 읽기 위해선 최소 1주일에 1권은 꼭 읽어야 한다. 평소의 습관을 고려한다면 나에겐 꽤 도전적인 과제이다. 게다가 도서관에 들릴 때면 주제넘게 묵직한 책만 집어드니 반납일이 다가오면 항상 쫓기듯 책을 읽게 된다. 사실 요즘은 독서가 숙제처럼 여겨지기도 하나 적당한 강제성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좋은 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다 너무 버겁다 싶을 땐 가끔 반칙처럼 내용면에서나 부피면에서 살짝 부담 없는 책을 빌려온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바로 그랬다.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란 제목과 어울리게 귀여운 일러스트로 다양한 집들이 그려져 있는 예쁜 책이다. 게다가 빵을 자주 굽는 나에겐 '동네 사람들에게 건넨 수제 케이크 200개의 기적'이란 소제목에 당연 시선이 확 끌린다. 더 이상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곧장 도서 대출 창구로 향했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담인 책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방 출신인 그녀는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온갖 갈등과 차별에 휩싸인 대도시 베를린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그 갈등이란 게 지방과 도시, 동독 출신과 서독 출신, 외국인,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어느 동에 거주하냐에 따라 골이 깊기만 하다. 나로선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심지어 임신 중이거나 어린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은 심한 혐오와 더불어 일종의 공격성까지 느끼기도 한다. 육아 휴직 중인 작가는 더 이상 그런 분위기에 순응하고 살 순 없다 생각하여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서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200일 동안 200개의 케이크를 만들어 200 가구를 방문하는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를 세우게 된다. 결코 아무나 없는 다소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이후 작가는 120일 동안 2893번의 초인종을 누르고 130 방문에 성공하여 200명의 소중한 이웃을 알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낯선 집 초인종을 누르는 작가만큼 나 역시 긴장되긴 마찬가지다. 저 문 뒤로 과연 어떤 사람이 나타날까, 무안한 상황이나 혹 위험한 일은 벌어지질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리게 된다. 별 사고 없이 프로젝트를 마쳤고 책이 출간된 지 10년도 지났건만 소설이 아닌 실제 경험담이기에 내겐 보다 생생하게 와닿는다. 마치 내가 지금 남의 집 앞에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양 긴장감을 놓칠 수 없게 된다.



모처럼 숙제 같은 느낌 전혀 없이 아주 재밌게 책을 읽었다. 짧은 감상평을 적기 위해 다이어리를 펼치며 혼자 중얼거린다.

'정말 간도 크지. 아무리 들어오란다고 남자 혼자 있는 집에 따라 들어가? 이 무서운 세상에 무슨 일을 당하려고'

실제 문을 열어 준 한 남자는 그녀가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현관문을 열쇠로 채우고 그 열쇠를 바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남자의 행동에 그녀는 그 집을 나오는 순간까지 줄곧 오싹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선 문 앞에 선 사람도 문 뒤에 선 사람도 서로가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낯섦과 두려움은 우리 사이의 벽을 쉽게 허물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한다. 매일 새로운 집 앞에 서서 떨리는 맘으로 초인종을 누르는 작가의 행동은 많은 걸 생각을 하게 한다.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감무쌍한 행동이기에 아마 그때의 경험들은 앞으로 그녀 인생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게 분명하다. 아울러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를 별 의심 없이 집안으로 들인 동네 사람들 역시 나에겐 존경의 대상이다. 하지만 세상이 무섭고 겁 많은 난 감히 그녀의 방문을 거절한 대다수의 이웃을 비난하지 못한다. 아마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을 테니깐.




저녁 설거지 중이었다. 갑자기 초인종이 울린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배송될 택배조차 없다. 분명 다소 수상한 목적을 띤 사람일 게다. 신문 구독이나 우유 배달 혹은 절에 시주를 부탁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아무도 없는 척 가만있으려다 갑자기 마음을 바꿔 인터폰이 있는 쪽으로 향한다. 얼마 전 읽은 책의 영향 때문인지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냥 외면하긴 좀 힘들어진다.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고 인터폰을 들여다보니 처음 보는 젊은 남녀 커플이다.

"누구세요?"

"네, OOOO호인데요"

진짜 이웃이다. 드디어 우리 집에도 낯선 이웃이 벨을 눌렸다. 혹시 그녀가 이번엔 남편과 함께 찾아온 건 아닐까.



한 달 후 이사 올 예정인데 곧 시작될 리모델링 공사 소음 때문에 미리 양해를 구하러 왔단다. 알고 보니 요즘은 공사 전 이웃들로부터 양해 각서를 받아 관리 사무소에 제출하는 게 순서였다. 머뭇거림 없이 얼른 그들이 내민 서류 위에 사인을 해줬다. 우리도 1년 후 이사가 계획되어 있고 리모델링을 할 생각이라 궁금한 게 많다고 하자 고맙게도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 한다. 날씨가 선선해질 때쯤 리모델링 구경도 할 겸 자문도 구할 겸 집을 방문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기분 좋은 미소로 언제든 오라 한다. 늦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다른 집도 가봐야 하는 바쁜 상황이기에 잠시 들어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짧은 인사 후 문을 닫으려는 순간 수줍게 웃으며 키위 한 박스와 쓰레기봉투를 내게 내민다.



생각도 못한 그들의 선물이 반가운 것도 있지만 이웃과 왕래가 드문 우리 집에 새로운 이웃이 찾아와 준 사실이 날 더 설레게 만들었다. 퇴근한 남편에게 새로 이사 올 이웃에 대하여 신이 나서 떠들어 댔다. 낯선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쩜 먼저 다가와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반가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가 보다. 앞으로 그들과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알 순 없지만 용기를 내어볼 생각이다. 가을이 무르익을 때쯤 진한 초코 머핀을 굽고 커피를 내려서 그들의 집을 방문할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얘기해야지.

"제겐 진한 초코머핀과  갓 내린 향긋한 커피가 있어요. 저와 커피 한잔 마시면서 얘기 좀 하실래요?"

물론 저번에 리모델링에 관해서 물어봤던 이웃임을 먼저 밝힌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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