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Oct 29. 2024

겁쟁이가 숨지 않아도 되는 나라


어제 본 일기예보 그대로다. 유리창에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다. 핑곗거리 찾았으니 이젠 당당히 게으름을 피울 차례다. 이 빗 속에 무슨 궁상으로 산을 향해 나선담. 게으름이라 하지만 사실 20분 정도 이불을 더 움켜잡고 있을 뿐이다. 날씨 탓에 아침 운동은 건너뛸 순 있지만 마냥 이불속에 파묻혀 있을 순 없다. 고 3 딸아이를 깨워야 한다. 언제나 일찍 일어나 1시간 공부를 한 뒤 학교에 가는 기특한 아이다. 게다가 오늘은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다.



갑자기 며칠 전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이 떠 오른다.

"10월 모의고사는 아이들 자살 방지용 시험이라 하잖아요"

대체로 쉽게 출제되는 10월 모의고사를 빗대하는 말이란다. 섬뜩하다 싶었지만 그땐 그냥 같이 웃어넘겼다. 하지만 이 아침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다. 기껏 망친 시험 하나로 죽음을 떠올릴 수 있다니.



어제 읽은 책 때문에 약간 화가 나 있다. 그래, 흥분하지 말자. 주제넘은 짓이다. 미처 알지 못한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떤 상처를 품고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 화자가 되어 대신 그들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알려주면 모를까. 아마 그래서 '채식주의자'란 책이 내겐 그리 어려웠나 보다. 영혜 자신도 그리고 작가마저도 도대체 영혜가 왜 저러는지 시원스레 얘기를 해주질 않았기에.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까진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동호와 정대를 탓했다. 우리 집 큰 놈을 떠올리면서. 그 나이땐 덩치만 어른만 해졌지 속은 아직 여물지 못해 생각 없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 저리도 부모 맘을 몰라주고 철없는 행동을 하는지 한심스러웠다. 싸잡아 같이 흉봤다. 중 3밖에 안된 어린놈들이 그 난리 통에 집에 가만히 있지 왜 그런 위험한 델 싸돌아 다녀. 남겨질 부모는 왜 생각 못 해. 산다고 사는 게 아닐 부모 맘은 왜.



천에 가린 채 참기 힘든 악취를 내뿜으며 바닥에 누워 있는 수많은 죽음을 동호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평소의 동호라면 전혀 엄두도 못 낼 곳이다. 무엇이 동호의 두려움마저 집어삼켜버렸을까. 천을 걷어 일일이  확인해 가며 총에 맞아 쓰러진 정대를 찾는다. 무섭지도 코를 막지도 않는다. 엉망진창으로 나올 성적 때문에 세상이 곧 끝날 것 같던 그런 순간들은 지금 동호에겐 정대와 함께 다시 돌아가고픈 그저 평범한 날의 아주, 아주 자그마한 소동일 뿐이다. 이젠 더 이상 예전의 동호가 아니다.



책 속 까만 글을 대본 삼아 머릿속엔 끊임없이 영상이 돌아간다. 장면이 바뀌고 큐싸인이 떨어지자 어둔 밤 외진 숲으로 군용 트럭이 들어선다. 잠시 후 군인들이 싣고 온 시체를 열 십자로 쌓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같은 일은 반복되고 새로운 시체탑들이 계속 들어선다. 남아있는 육신의 덩어리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있는 그림자 같은 영혼들. 그 속에 파리와 구더기들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자신의 얼굴을 몇 날 며칠 바라다보는 정대가 있다. 또래보다 작고 개구진, 공부하기 싫어하는 흔하디 흔한 중 3짜리 머시매. 죽은 엄마 대신인 누나가 전날 집에 돌아오지 않자 동호랑 누나를 찾아 나섰을 뿐인데. 네가 뭘 잘못했다고 거기 그러고 있는 거야. 검은 활자를 너머 모든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는 내 입에선 어느새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온다.



"엄마, 괜찮아?"

연신 훌쩍이며 코를 푸는 내 모습에 딸아이가 걱정스레 물어본다. 물론 난 괜찮다. 그 소름 끼친 공포를 직접 보지도 듣지도 느껴보지도 않았기에. 억울하게 누군가를 잃은 밑바닥 깊은 슬픔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이깟 눈물 콧물 좀 질질 흘린다고 괜찮지 않을 게 없다. 휴지를 수북이 쌓아가며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 속에 책을 읽어 내려갔지만 책을 덮은 후 불을 끄자 이내 잠이 든 나 자신이 이 아침 다소 실망스럽다.



책을 읽고 나자 무슨 이유에선지 군에 있는 큰 애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아이가 입대하고 렇게까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주일 동안 아이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무심한 놈. 그냥 잘 있다고 간단히 문자만 보내줘도 한 주는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으련만. 팔팔한 지들은 부모 걱정 안 하는데 나이 들어 힘 빠진 우리는 왜 항상 자식 걱정이 먼저인지. 결국 아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잘 있는지 별 일은 없는지 엄마가 갑자기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답이 없는 걸 보니 아직 보지 못했나 보다. 그곳에도 비가 오고 있으려나.



잠은 설치지 않았지만 날씨 때문인지 남겨진 책의 여운 때문인지 기운이 쫙 빠진 느낌이다. 빗방울 흐르는 유리창 너머 흐릿하게 동호와 정대의 얼굴에 떠오르자 지난밤 먹먹함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온다.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취재를 다니며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피해자와 가족으로부터 그 살 떨리는 얘기들을 전해 듣고 맨 정신에 어떻게 버텼을지 안쓰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꿋꿋이 글을 써 준 그녀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동시에 무심하고 무지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 고개가 떨궈진다.



넌 어땠을 것 같니. 뻔한 내 속내를 넌지시 떠본다. 만약 그 시간 그곳에 머물렀다면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시위하는 군중들 속에 아님 자원 봉사자들 속에 네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겁쟁이 네 얼굴을.



찾았다. 겹겹이 둘러싼 보호막 안에 숨어들어 한껏 움츠린 채 숨 죽이고 있는 내 모습을. 혹시라도 어찌 될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는 그 작은 몸뚱이로 어미새마냥 새끼들을 최대한 품고 있다. 감옥에 잡혀가는 일이 아니라면 욕을 들어도 손가락질당해도 상관없다.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겐 내 자식 내 가족이 가장 소중할 따름이다. 그들이 없다면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내겐 아무런 의미 없을 테니. 그저 최대한 몸을 감추고 평범했던 그날이 다시 오길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돌아보면 아픔이 많았던 나라다. 일일이 대기도 힘든 그 시절들을 모두들 어떻게 버텨냈을까. 어쩜 그것밖엔 딴 도리가 없었을  게다. 그저 버텨내는 수밖에. 왜 하필 이런 나라 이런 시대에 태어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원망만 하며. 나같이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것이었을 그 원망들은 '한', '응어리'란 단어로 지금껏 우리의 슬픈 정서를 대변해오고 있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에 별 어려움 없이 살아온 난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주축이 될 대한민국은 또 어떤 모습일까. 부디 나 같은 겁쟁이가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계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