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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Apr 29. 2024

작은 애벌레에 대한 연민

우리는 같은 생각 같은 곳을 보고

    이 동네는 도심과 가깝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탓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낡아 있던 옛날식 아파트와 연립주택들이 수십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만큼 큰 변화 없이 고여 있다. 하지만 나뭇가지마다 연두색이 피어오르는 계절이 시작되면, 지하철역에 내리자마자 푸릇푸릇한 풀 냄새가 코를 파고들어 기분을 맑게 한다. 주말마다 오르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번화가에 살 때는 느낄 수 없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날이 따끈해지자 뒷산의 풍경은 조금 더 다채로워졌다. 붉은머리오목눈이와 박새가 덤불 속을 활발하게 쏘다니고, 멧비둘기가 부드럽게 구구거리는 동안 까마귀와 까치가 시끄럽게 울어 대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직박구리가 설익은 열매를 쪼아 먹고, 사람의 눈에는 띄지 않는 곳에서 이따금 딱따구리가 나무기둥을 쫀다. 정상까지 올라온 호랑나비 한 무리가 하늘을 수놓고, 이제 막 부화했을 법한 작은 대벌레들은 나무 데크의 울타리를 한쪽씩 차지하고 있다. 혀를 길게 빼어 물고 흙길을 밟는 강아지들도 넘쳐난다.


    정상을 찍고 내려오는 길에 실을 타고 내려온 애벌레를 마주쳤다. 하필이면 등산객들이 오가는 등산로 한가운데 내려와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얼굴에 정면으로 부딪칠까 봐 놀라서 얼른 허리를 꺾어 피한 뒤 계속 내려오다가, 신발에 짓이겨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된 다른 애벌레의 사체를 발견했다. "마음이 안 좋네……."라고 중얼거리자, 텀블러에 담긴 얼음을 털어 먹던 남자친구가 "아까 걔도 구해 줄 걸 그랬나?"라고 대답했다. 그 뒤로 보이지 않는 실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통통한 초록색 애벌레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소위 '결혼 적령기'를 맞은 청년 세대의 혼인 비중이 절반 아래로 떨어진 시대에 드물게 결혼 준비를 하려니 종종 지인들로부터 "왜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어?"라는 질문을 받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평생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을 새로 만들고 싶었다는 선에서 정리하곤 했다. 그리고 내가 비닐봉지를 쓰기 싫어한다고 말한 뒤로 꼭 장바구니를 챙겨 외출하는 사람, 작은 애벌레에 대한 염려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을 느긋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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