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하는 부역 행위
돌이켜 보면 2012년도 제18대 대선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했을 때 '광풍'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거에 '과몰입'해 있었다. 나 역시도 선거방송의 당선자 예측 발표를 본 뒤 혼이 나간 채로 대충 마감을 하고, 회사 근처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앉은 선배들 앞에서 당시에는 잘 먹지도 못하던 소주를 때려 부은 뒤 목을 놓아 울 정도로 선거 구도에 몰입해 있었다. 더 험한 꼴을 많이 보고 있는(현재진행형이다) 지금에 와서 그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떠올리면 웃음만 나온다. 10살은 더 어리고 젊어서 기운도 좋았구나, 뭐 그런 느낌으로.
다만 당시에도 도저히 눈의 초점을 흐리고 참아 넘길 수가 없는 부분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일례로, 왜 똑똑한 고모들이 아니라 아빠가 대학에 갈 수 있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을 좀 희한한 방향으로 굴절시켜 "우리 손주가 최고로 잘났다"며 아들에게서 본 첫 손녀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친할머니의 손에 자랐고, 여중을 졸업한 뒤 사실상 여고나 다름없이 여학생들이 상위권 석차를 점령하던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나왔다. 때문에 과거 자라 왔던 환경과 정반대로 남성이 수적, 문화적 주류를 차지하는 대학 사회 안에서, 내가 성별 개념을 첨가하지 않은 '우수한 인재'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기만 한 존재' 취급을 쉼 없이 받는다는 데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2015년 '메르스 갤러리'의 출현 이전에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10~20대 여성은 희귀한 편이었다. 아직은 완벽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많지 않다고 변명하며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로 자기 방어를 하곤 하던 가엾은 헛똑똑이는, 몇 번이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경험을 한 뒤 뒤늦게 정체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내가 그건데 뭐 어쩌라고. 이야기가 길었는데, 2012년 대선 당시 엄밀히 말해 양대 구도의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기는 했으되, 여성 당사자로서 사회적 소수자인 유권자를 수시로 열외에 놓는 수사에 끊임없이 분노하곤 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숨 가빴던 2012년. 온갖 '아름다운' 어휘로 치장됐지만 당의정을 한 겹만 벗겨내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말들이 전국을 달구었던 2012년. '우리 편 후보'의 정결함과 당선의 역사적 당위성 등을 유권자들에게 소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들이 이어지던 2012년. 아아, 2012년. 후보자들의 당선 수락 연설과 선거 슬로건이 발표됐을 때부터 이미 예상했어야 하건만. 당시 '문재인의 멘토'이자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나선 안도현 시인은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 발표 직후 벅차오르는 감정이 행간에 가득 묻어나는 트윗을 게재했다. "남자인 제 가슴에 찌르르 젖이 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세상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뭘 본 걸까. 그는 문재인 후보에게 '숫처녀'라는 훈장을 달아 주고, 기성 정치인을 '똥갈보'라고 손가락질한 고은 시인과의 술자리 일화를 자랑스럽게 소개하기도 했다. 짜잔, 그리고 어떻게 됐을까요?
그때부터 좁은 의미의 정치적 의제에 필요 이상으로 열을 내는 예술인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어떤 주제를 다루든 '정권 창출', '권력 획득'의 깔때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안전한 발화만을 하면서 인기를 얻는 일군의 사람들. 그런 식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치들도 있고, 떠오르는 신성들도 있다. 특히 후자는 SNS에 정보값이 거의 없고 화려하게 비아냥댈 뿐인 문장들을 툭툭 던지며 위트를 과시하고, 정치적으로 구미에 맞는 데다 예술인의 권위와 후광까지 두른 말들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지지자들로부터 맹목적으로 추앙받는데, 정작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대표작은 별로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의 초입을 잠시 넘겨 본 뒤로, 예술을 하려면 역시 세상과 적극적으로 불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정치 진영을 떠나서 인간됨에 대한 고민, 삶에 대한 고민 따위를 머리 터지게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다. 삶의 끔찍함을 직시한 뒤 던지는 질문은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너희는 왜 이 모양일까? 세상은 왜 이 모양일까?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우리 편 국회의원 만들기, 대통령 만들기에 힘쓰는 것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주류에 대한 부역이라면 모를까. 원색적인 '대통령 개새끼', '국회의원 개새끼' 등의 외침에서 얻을 수 있는 보다 깊은 고찰이 있을까? 뭐, 같은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