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 덧붙임 : 스포주의
셀린 시아가 연출한 그림 같은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오르페우스 문제problem’(어원인 고대 그리스어 próblēma에는 ‘곶’, ‘절벽’의 의미도 담겨있다)에 시종일관 매달려 있다: 오르페우스는 명계를 벗어나기 전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뒤를 돌아봤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비추며 ‘오르페우스 문제’에 매달려 있음을 관객들에게 인식시킨다. 영화는 뒤를 돌아봄(Rück-blick)과 과거를 회상(Rückblick)하는 것의 미묘한 중첩에 매달려 있다. 첫 장면은 프로타고니스트인 화가 마리안느의 작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며, 프로타고니스트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첫 대면과 헤어지는 장면 모두 뒤돌아보는 시선을 통해 그려진다. 결국 영화 전체가 ‘오르페우스는 왜 뒤를 돌아보았는가?’에 대한 재현과 진술로 구성된다.
그림 같은 영화이니만큼 영화의 중심소재 역시 회화적이다. 달리 말해, ‘빛’과 ‘색’이다. 이는 인물의 옷과 도구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화가 마리안느는 빨간색 드레스를 입는다. 이는 불과 빛을 상징하는데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관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그는 촛불을 들고 다니며 그가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모닥불이 타오른다. 반면 엘로이즈는 파란색 드레스(물)를 입으며 해안가(파도)를 거닌다.
그리고 영화의 갈등은 곧 회화의 완성과 직결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마주한 위기는 첫 번째 위기는 바로 ‘초상화의 완성 여부’다. 의뢰를 승낙한 화가 마리안느는 초상화를 완성시켜야 하고, 완성된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정혼자에게 전해질 예정이므로 결혼 성사를 위해 쓰여진다. 그러나 엘로이즈는 자신의 결혼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포징을 거부하는 데서 영화는 첫 위기에 봉착한다. 화가는 초상화의 대상과 짧은 만남을 이룬 뒤 단지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마리안느는 어찌어찌 완성시키긴 하지만, 제약된 환경 탓인지 그림에는 생동감이 없다. 화가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zôgraphos(살아 있는 것을 기록하는 자)이지만, 마리안느는 화가의 본질을 이루는데 실패한 것이다. 결국 그는 애써 완성한 그림을 지우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둘의 사랑이 시작하고 초상화의 양상이 사뭇 달라지는 영화 —엘로이즈가 자발적으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중반부터 엘로이즈가 입은 드레스는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바뀐다. 파란색이 물(파도)을 상징한다면 초록색은 초목을 상징하므로 이제 그녀의 옷(마음)에는 —회화를 비추는 빛이자 사랑으로서의— 불이 옮겨 붙을 수 있게 된다. 종국에 이르러 초상화는 완성되고, 둘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하지만, 완성된 초상화가 정혼자에게 전달되기 위해 바다에 오르는 순간, 불같은 사랑은 더 이상 타오를 수 없다. 영화가 봉착한 두 번째 위기지만, 그들은 오르페우스의 비극적인 결말을 뒤따른다. 즉, 헤어짐이다.
마치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별처럼 그려지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헤어지는 장면에서 엘로이즈는 하얀색 드레스를 입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의적이다. 오르페우스가 떠나보낸 에우리디케의 수의임과 동시에 결혼하는 새신부의 드레스이다. 그리고 회화에서 흰색은 곧 백지 상태(tabula rasa), 그 무엇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다.
초상화를 통해 이룩한 그들의 사랑은 지워져야 한다.
이러한 영화의 소재는 사운드 스케이프적인 측면에서도 두드러진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음악 기용을 제한하는데, 영화를 채우는 대부분의 소리는 모닥불 타는 소리와 파도 소리이다. 마리안느가 주가 되는 장면에서는 모닥불 타는 소리가 배경을 채우고, 엘로이즈가 주가 되는 장면에서는 파도 소리가 배경을 채운다. 이를 제외하고 유이하게 등장하는 음악은 바쿠스제를 모사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현대의 미니멀리즘 음악과 유사한— 아 카펠라와 비발디가 작곡한 《사계》 중 <여름>이 전부이다.
영화의 회화성에 대한 부연은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영화는 여전히 ‘오르페우스 문제’에 매달려 있다: “오르페우스는 왜 고개를 돌렸을까?”
영화 중간에는 이 문제에 대한 인물들의 직접적인 답변이 등장한다. 이때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내뱉는 답변은 일반적인 답변, 즉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두려운 나머지 고개를 돌렸다’는 이유와 사뭇 다르다. 화가인 마리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에우리디케의 귀환 대신] 선택한 거죠.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죠.”
지극히 예술가다운 답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엘로이즈의 답변.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
우리가 뒤를 돌아보는 이유는 지금 눈앞에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 눈앞에 볼 수 없는 것은 지나간 추억일 수도 있고, 사물 혹은 사람일 수도 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사물의 이면[배후]을 포착하기 위함일 수도 있다. 예술은 후자의 경우를 가시적(혹은 가청적)인 표현으로 환원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한다.
회화의 궁극적 이상에 대한 플라톤과 화가 파리시오스와의 대화에서 도출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회화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의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에 그쳐서는 아니된다. 보이지 않는 영혼을 모방해야 한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올라가려면 다음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회화는 우선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재현한다. 마지막으로 프시케의 에토스(te tés psychés éthos, 영혼의 심적 표현, 결정적인 순간의 심적 성향)를 재현한다.”
영화의 대사 중 이런게 있다: “사랑에 빠지면 다들 뭔가 창조하는 느낌일까요?”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aphantos)”을 보려고 함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이별하기 전 에우리디케의 사라짐을 모방하는 그의 환영(phantasma)을 두 번 목격한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이렇게 말한다 : “뒤돌아봐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뒤돌아보는 오르페우스의 시선에서 예술과 사랑은 하나가 된다. 예술과 사랑은 모두 창조적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은 마리안느가 그린 작품에서, 그리고 엘로이즈가 그려진 작품에서 표현된다. 마리안느는 뒤돌아본 오르페우스와 사라지는 에우리디체를 그렸는데, 이때 오르페우스가 두른 숄은 엘로이즈가 둘렀던 로브의 색(파란색)과 동일하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마리안느가 책에 그린 자화상이 남아 있는 페이지(28쪽)를 손으로 표시한다.
마지막으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장소는 연주회장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발견하지만,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영화의 시작이 그림을 통한 마리안느의 회상으로 시작한다면, 마지막은 음악을 통한 엘로이즈의 회상으로 끝난다. 카메라는 엘로이즈가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희비가 교차하듯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비추지만, 회상의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 감독이 엘로이즈의 회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회화는 보이지만, 음악은 보이지 않는다.
엘로이즈가 흘리는 눈물은 양가적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유년기를 수녀원에서 보낸 탓에 합창은 익숙하지만 기악 음악은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마리안느에게 말한 적이 있음을 상기했을 때, 처음으로 기악 음악을 듣는데서 비롯하는 감동과 희열의 눈물일 수도 있다. 혹은 <여름>의 첫 구절을 연주했던 옛사랑인 마리안느를 회상(Rückp-blick되돌아-봄)하는데서 비롯하는 비탄과 회한의 눈물일 수도 있다.
영화는 엘로이즈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음악에서 비롯된 눈물이니까! 그러나 전자와 후자 모두 오르페우스에게서 비롯된 눈물임에는 틀림없다.
오비디우스는 오르페우스와 관련된 눈물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가 “뤼라를 연주하며 이렇게 노래했을 때 핏기 없는 망령들도 눈물을 흘렸다. (···) 그때 처음으로, 소문에 따르면, 자비로운 여신[복수의 여신]들도 노래에 압도되어 볼이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의 문턱 앞에서 고개를 돌려 다시 에우리디케를 잃은 뒤 “오르페우스는 또다시 [스틱스] 강을 건너고 싶어 간청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뱃사공이 거절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누추한 모습으로 이레 동안 케레스의 선물도 즐기지 않고 거기 강가에 앉아 있었다. 근심과 마음의 괴로움과 눈물이 그의 양식이었다.”
孫潤祭, 2023.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