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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Nov 05. 2023

《뻔한 주제의 지브리식 변주곡》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에 덧붙임

지브리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애니메이션들은 언제나 뻔한 주제(정직하게 살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등), 또 언제나 해피엔딩이다—이는 픽사의 애니메이션에도 적용된다. 슬슬 유치하고 진부하다고 느낄 법도 하지만, 유년기부터 보기 시작했던 저 애니메이션들을 청년기에 다다랐음에도 관성처럼 보게 되는 이유는 익숙한 주제들의 서로 다른 변주곡들을 감상하기 위함일 테다.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만든 이번 변주곡의 주제, 그러니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2023) 영화의 플롯은 주인공 마히토가 잃어버린 어머니(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생모 히사코와 실종된 계모 나츠코)를 되찾아 오기 위해 정체불명의 탑 안의 세계(‘아래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다. 이 여정에서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마주하는 장애물은 바로 ‘새’다.

영화 속의 ‘새’들은 ‘마히토’의 모험에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환상 세계에서 마히토를 안내하는 왜가리는 ‘거짓말쟁이’이며, 펠리컨과 앵무새들은 그를 잡아먹기 위해 안달이 나있는 상태다.


새들이 마히토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마히토(眞人: 진인, 진실한 사람, 참인간)’라는 이름은 ‘진실은 말하는 자’를 의미한다. 반대로 ‘새’들은 악의와 거짓에 물든 존재자이다. 거짓에게 진실이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잡아먹어야만 하는 제물이다. 펠리컨은 그를 산 채로 삼키려고 하며, 앵무새들은 몸 뒤편에 칼과 포크를 든 채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


왜가리의 친척인 펠리컨은 무엇이든 입에 들어갈 수 있는 알맞은 크기라면 먹이로 인식해 산 채로 삼키는 새이므로 이기심과 악의를 상징한다. 펠리컨은 동정과 자비 없이 자신만의 생존을 위해 곧 태어날 생명체의 전단계인 ‘와라와라’를 잡아먹는다. 또한 앵무새는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저 공중에 떠도는 말들을 다시 되뇌는 새이므로 가십과 루머를 상징한다. 유일한 진실과 달리 압도적인 다수의 가십과 루머는 마치 바이러스처럼 급속도로 확산됨으로써 진실을 가린다. 그래서 펠리컨과 달리 앵무새는 진실을 한 번에 삼키지 못하므로 요리를 통해 천천히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일 테다.

 

이처럼 하야오가 탑의 세계를 통해 비추는 장소는 평화롭고 전원적인 ‘천상낙원’이 아니라, 악의로 가득 찬 기만과 거짓이 진실을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지옥’이다. 이 점에서 실질적으로 환상적인 탑의 안쪽과 군국주의로 촉발된 전쟁이 진행중인 탑의 바깥쪽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지옥에서 진실(마히토)이 거짓(앵무새)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마히토를 구원하는 이는 불의 소녀 ‘히미’다. ‘히미’는 자유자재로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불은 진실의 획득(구원) 가능성, 즉 ‘이성’을 상징한다. 불이 발산하는 ‘빛’은 예로부터 진리의 상징(e. g.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으로 여겨졌기에 히미의 능력이 새(거짓)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하다.


그러나 막강한 능력을 가진 히미마저 제한되는 곳은 바로 ‘터부taboo(산모가 쉬고 있는 산실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와서는 아니 된다)’가 지배하는 산실이다. 산실에서 쉬고 있는 나츠코를 구출하기 위해 금기를 깨고 들어선 마히코와 히미의 계획은 무산되고, 기력을 쇠한 채 쓰러져 그만 앵무새들에게 포획당하고 만다. 명확한 인과관계에서 성립하지 않는 터부와 미신은 이성을 마비시킨 채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지배하고 제약하는 탓이다.


이후 영화가 비추는 것은 ‘큰할아버지’와 마히코의 만남이다. ‘아래 세계’의 창조자인 큰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대업(탑의 현상유지)을 이을 후계자를 찾는 것인데, 자신의 피를 물려받았으며 때마침 ‘아래 세계’로 들어온 마히토가 그의 눈에는 후계자로 적합해 보였을 것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악의에 차지 않은 순수한 돌 13개(하야오가 각본과 감독을 모두 역임한 작품의 개수와 같다)를 보여주며 그에게 돌들을 질서 있게 쌓아 평화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을 권유한다.


하지만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며, 이후 앵무새 대왕의 칼부림과 함께 ‘아래 세계’의 붕괴가 시작된다.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마히토의 거절은 하야오가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마히토의 거절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한편으로 자신은 친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기에 큰할아버지의 대업을 이어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큰할아버지는 지식에 탐독한 나머지 추악한 현실을 외면하고 가족과 친구를 떠나 순수하고 평화로운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탑으로 홀연히 사라졌던 인간이다. 그가 돌의 힘을 빌려 건설한 이상적인 낙원은 부분적으로는 성공한 듯 보이나, 대부분의 ‘아래 세계’에는 이상과 실재(부족한 자원과 음식)의 괴리 속에서 고통받는 생명체들(펠리컨과 앵무새)이 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1차 세계대전 패배 후 처절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국민들을 빗나간 이상(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을 통해 하나로 모아 만들어진 집단이었음을 상기했을 때, 관객들이 앵무새 대왕과 그 부하들을 보고 독일의 나치스들과 대일본제국의 신민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할아버지는 마히코의 꿈 장면에서 위태롭고 불완전한 세계를 개선할 생각은 없고 하루하루 연명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그의 무능력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겠으나, 가장 큰 문제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동료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는 붕괴하는 세계와 함께 —세계를 만들었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다른 한편으로 마히토는 자해로 생긴 머리의 상처가 악의의 증거라고 말하며 순수한 13개의 돌을 쌓을 수 없다고 말한다. 머리에 난 상처는 전학간 학교의 원래 학생들이 마히토를 미워해서 생긴 것이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을 요량으로 돌을 집어 자신의 머리에 박아 피를 흘린다. — 이 사건은 마히토가 ‘아래 세계’에 들어가게 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또한 마히토는 탑에서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을 처음에 악한으로 보지만, 부족한 자원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는 늙은 펠리컨의 증언에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리고 ‘아래 세계’의 붕괴는 탑 속 생명체들의 엑소더스를 야기하는데, 탑과 현실을 가르는 문을 통과하자마자 인간적이고(말을 하고) 추악한 모습을 띤 펠리컨과 앵무새들은 자연 속의 동물로 되돌아간다.


이 장면들이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모든 우주와 생명체를 초월해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 따라서 선과 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매우 상대적인 개념에 불과하며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정리하자면, 하야오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변주곡은 다음을 노래한다. 선과 악을 가르는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언제나 관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할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 그리고 폭력과 거짓이 팽배하는 추악한 현실을 외면해 도피하지 말고 친구와 함께 이겨내라는 것, 그러니까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 이것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하야오의 대답이다.


하야오의 질문과 대답은 마히토가 자기 방 문을 나서며 원래 살던 도쿄로 되돌아가려는 문턱에서 끝난다. 이제는 우리가 질문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孫潤祭, 2023. 1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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