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영원회귀’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덧붙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영원회귀는 인간의 선택과 이로 인한 몸짓들에 참을 수 없는 책임의 짐을 존재에게 부과한다. 니체는 말한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하지만 왜 이러한 가장 무거운 짐을 니체는 인간에게 부과하려 드는가? — 이는 자기 스스로의 전적인 의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로 결정한 인간만이 반대로 가벼워질 수 있다는 니체의 역설적인 이상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인간은 “요람에 누워 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무거운 말과 가치를 받는다. 이 지참금은 ‘선’과 ‘악’이라고 불린다. 그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것을 허락받는다. (···) 그리고 우리—우리는 우리에게 지참금으로 주어진 것을 딱딱한 어깨에 메고 험준한 산을 넘어 충실하게 끌고 간다! 이때 우리가 땀을 흘리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 삶이란 짊어지고 다니기에 무거운 거야.”
쿤데라는 쓴다. 이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신의 죽음 이후 피안과 이로부터 비롯되는 가치(진리와 이성, 선과 악)를 부정하는 인간에게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무언가로 바뀐다. 이때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의미는 생존의 문제로 돌변한다 : 인간의 실존적 한계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무의미).” — 신형철
이때 니체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극한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으로서의 ‘영원회귀’다. “만약 네가 하고 싶은 모든 것에 있어서 네가 무한히 그것을 하길 원하는지를 확신하는지 자문하면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네게 있어서 가장 확고한 무게 중심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에게 영원회귀는 일종의 ‘닻’이자 ‘돛’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한 인간은 (···)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야말로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부르짖는다.”
쿤데라는 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배토벤의 음악, 역에서의 죽음)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형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 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니체의 다카포는 이러한 악보의 가장 마지막 마디에 그려질 테다.
인간이 다 카포되며 연주되는 것은 사랑의 주제다. “오, 영원이여,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는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가 오직 바라는 것은, 이제부터는, 긍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애의 결혼을 상징하는 반지는 영원회귀가 된다. “오, 내가 어떻게 영원을 갈망하지 않겠는가. 반지들 중의 결혼반지, 회귀의 고리를 갈망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인간과 영원의 사랑이 낳은 결실이 바로 초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니체의 “알파이자 오메가” 즉, “모든 무거운 것이 가벼워지고, 모든 몸이 춤추는 자가 되고, 모든 정신이 새가 되는 것”이다. 즉, “가장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진 채 혼돈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미래의 영원한 봉인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이 의지를 통해, 허무주의는 삶에 대한 극단적인 동의로 전복”(아감벤)되는 것이다.
孫潤祭, 2023.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