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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윤제 Dec 30. 2023

《조율》

니체가 제기한 ‘영원회귀’는 인간의 선택과 이로 인한 몸짓들에 참을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다음의 질문을 통해 실존에게 부과한다. “너는 이 삶을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이 ’질문‘은 ”모든 경우에 최대의 중량으로 그대의 행위 위에 얹힐 것이다!”


니체에게 삶은 ’순음‘이 아니라 ‘배음’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어떤 순간을 긍정한다면 우리는 그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실존을 긍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나 사물에 있어서 그 자신을 위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즉, 삶에 있어 하나의 순간은 악기의 배음처럼 모든 순간, 즉 전체와 동시에 공명한다.


어쩌면, 실존의 자연적인 조건으로써 실존과 세계 간의 불협화(거짓, 잔인, 모순, 유혹, 무의미, 허무 등)에서 비롯되는 ‘고통’은 아직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수 있다.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는 불협화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연주를 시작하기 직전, A(440-443Hz 사이)음에 조율하는 과정을 필수로 거친다.


단 한 순간의 행복을 긍정하기 위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불행과 고통의 순간들을 영겁의 시간 동안 반복할 것을 감행하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영원회귀를 원한다면, 영원회귀는 조율의 문제 아닐까? — 저 한 순간의 행복이 바로 조율을 하기 위해 필요한 ‘A음’이다.


니체는 쓴다. “영혼이 단 한 번만이라도 행복한 나머지 하나의 현처럼 떨려 울린다면, 이 한 번의 사건을 산출하기 위해 전체 영원이 필요했다”. 어쩌면 실존과 세계와의 불협화음은 아직 악기들이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영원회귀라는 세계와 인간의 조율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삶’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하지 않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오로지 춤출 줄 아는 신을 믿을 것이다.“


孫潤祭,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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