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셋째 주
여러 방법 중에서도 핵심은 '평소'입니다. 글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생각들을 평소에 무엇이든 쌓아놓는 것이 중요해요. 갑자기 영감이 미친 듯이 떠올라서 글을 쓰는 모습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장면입니다. 잘하면 10장 정도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갈 수는 있겠지만, 300페이지의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요. 내가 언젠가 무언가를 만든다면 그것이 무엇이 될지, 아주 어렴풋한 실마리라도 떠오른다면 꼭 적어두세요. 그것이 답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생각을 반복하고, 그것을 쌓아두는 것이 중요해요.
유병욱 <인생의 해상도> 中
그래서 적어두는 이번주의 '아주 어렴풋한 실마리'.
2024년 11월 18일(화) 오후 3시. 2층 회의실.
회의실 안에는 큰 탁자가 놓여 있습니다.
박사님 1명, 차장님 1명, 직속상관인 대리님 1명, 그리고 저까지.
총 4명이 서로 마주 앉았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고, 살 떨리는 회의가 시작됩니다.
박사님이 먼저 입을 뗍니다.
알다시피, 이제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permanent한 job(정규직)을 구하고 있나?
목에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즘 permanent한 job이 얼마나 적은지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비정규직 146만 명 중에 1명이라고, 그나마도 이 1명이 되기 위해 무수한 지원자를 짓밟고 올라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충 둘러댔습니다.
"저도 계약 기간이 2달 정도 남은 걸 알고 있다"고,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전문가 양성/공공외교라는 연구원 목표를 고려했을 때, 제 일이 기여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후로도 이어진 이른바 '직무적합성 평가를 위한 면담'은 생선 가시를 넘어 목을 조르는 지경이었습니다.
"일은 재밌어요?"
"아... 재미.. 보다는..."
"... 알겠어요."
"저.. 박사님.. 열심히.. 했습니다"
"...... 네?"
"저, 열심히 했습니다. 그동안."
"... 알아요."
어느 작가가 말했던가요. '최초의 시는 가장 막다른 곳에서 지르는 비명'이라고.
2024년 11월 18일(화) 오후 4시. 다시 2층 회의실.
박사님이 빠지고 3명이서 다시 시작한 회의.
차장님이 먼저 말씀하십니다. 일동 부대 차렷.
알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당연히 계약 연장하자고 할 거야.
음... 근데 여기 계속 있고 싶어?
이 대답 또한 대충 둘러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고,
"일의 의미가 단순히 자아실현에 그칠 순 없다"고,
"한 개인이 짊어진 사회적 책임이기도 할 것"이라고 돌려 말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말을 하려다 패잔병이 됐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서사'는 승리의 서사이다. 세상을 턱없이 낙관하자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불행은 늘 균형이 맞지 않는다. 유쾌한 일이 하나면 답답한 일이 아홉이고, 승리가 하나면 패배가 아홉이다. 그래서 유쾌한 승리에만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어떤 승리도 패배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역도 사실이다. 우리의 드라마가 증명하듯 큰 승리의 약속이 없는 작은 패배는 없다.
故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中
2024년 11월 18일 오후 4시 30분. 다시, 다시 2층 회의실.
대리님과 단 둘이 남은 채 또다시 시작된 회의.
차라리 '수면 내시경으로 바꿔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XX 씨 열심히 한 거 알죠. 자리 비우면 진짜 일이 잘 안 돌아갈텐데, decision initiative(의사 결정단)는 온도 차가 좀 있고.. 그런(정규직 전환) 전례도 없고.. 괜히 이런 말 하는게 희망고문 하는 것 같고... 기자 말고 다른 job의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두면서..
드문드문 기억 나는 말들은 머릿 속에 콕 박혀서 빠져나오질 않았습니다.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회의실에선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모른다.
목이 말라서 눈을 뜬 차가운 새벽, 기억할 수 없는 꿈 때문에 흠뻑 젖은 눈두덩을 세면대 위의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리라는 것을 모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당신의 손이 거푸 떨리리라는 것을 모른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한강 <노랑무늬영원> 中
겨우 자리에 돌아와 녹초가 된 시각은 17시.
퇴근 시각을 1시간 앞두고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었습니다. 검토해야 할 리포트가 계속 날아들었기 때문입니다.
퇴근하면서 생각했습니다(오이 형이 생각 좀 그만하라고 했는데-> 하단에 full text 첨부).
내가 오늘 들은 말의 핵심은 뭐지.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지.
어떤 뉘앙스였지.
그동안 정말 수고했어.
우리 조금만 더 같이 일하면 안 될까?
'너도 알겠지만' 세상에 길은 많고, 시간은 충분해.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움직여봐.
그동안 여기서 시간을 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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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할래. 먹고살래, 아니면 나갈래.
물론 알지. 너 열심히 한 거 모르는 사람 어딨어.
근데 '너도 알겠지만' 원래 여기가 그런 곳이야.
안 돼. 그러니까 이제 너가 동아줄을 붙잡을지 말지 선택할 때야.
콜럼버스가 열어젖힌 대항해의 시대처럼 '넓은 고민의 바다'에서 구조요청을 보내던 수요일.
엄마 딸(여동생) 24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나이에 맞게 24만 원을 던져줍니다.
실실 쪼개며 돌아온 대답.
"개꿀~ 나 100살까지 살면 100만 원 받는 거임?"
"더러운 단어와 표현은 일상에서도 제거되어야 한다. 사람의 말 또한 위생을 필요로 한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언어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사회주의자였으니 좀 불편해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얘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하물며 그 옛날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도 품위 있는 말을 쓰는 게 좋다고 했는데 우리의 정치인들은?' 이라고 말입니다.
20170621 JTBC發 손석희 앵커브리핑<[앵커브리핑] 다시 말하기도 민망한…'아무말 대잔치'> 中
엄마 딸은 '엄마 아들 눈치'와 '친족으로써의 양심'을 고루 알고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생각해보니, 일주일 동안 '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도대체 전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안다'는 말은 누더기가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2016년 베네딕트 컴버배치 曰
가끔은 세상에 “Fxxk you“라고 말할 줄 알아야돼
Learn to say “Fxxk You” to the world every once in a while
너는 그럴 권리가 있어
You have every right to
그만 생각하고
Just stop thinking
그만 걱정하고
worrying
불안해 하지 말고
looking over your shoulder
망설이고,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상처받지 말고
wondering, doubting, fearing, hurting
쉬운길만 찾지 말고
hoping for some easy way out
혼자 낑낑거리고, 욕심 부리지 말고
struggling, grasping
혼란스러워하고, 가려워하고, 긁고, 머뭇거리지도 말고
confusing, itching, scratching, numbling
우왕좌왕하고, 투덜거리고, 비약하고, 휘청거리지도 말고
bumbling, grumbling, humbling, stumbling
조작하고, 횡설수설하고, 도박하고, 구르지도 말고
numbling, rambling, gambling, tumbling
문지르고, 밀쳐내고, 꽉 묶어버리고, 깨버리지도 말고
scumbling, scrambling, hitching, hatching
욕하고, 신음소리 내고, 끙끙 앓고, 불평하지도 말고
bitching, moaning, groaning, honing
분석하지도, 허튼소리 하지도, 따지지도 말고
boning, horse-shitting, hair-splitting
트집 잡고, 찝찝해하고, 오지랖 떨고, 쓸데없는 짓도 하지 말고
nit-picking, piss-trickling, nose sticking, ass-gouging
눈 찌르지도, 손가락질 하지도, 훔쳐보지도 말고
eyeball-poking, finger-pointing, alleyway sneaking
한참 기다리고, 찔끔찔끔 가고, 재려보고, 아첨하지도 말고
long waiting, small stepping, evil-eyeing, back-scratching
찾지도, 앉아서 쉬지도, 이름에 먹칠하지도 말고
searching, perching, besmirching
스스로 갉아먹고, 또 갉아먹고
grinding, grinding
스스로 갉아먹고, 또 갉아먹고, 또 갉아먹지 말고!
grinding, grinding, grinding away at yourself!
다 그만 두고
stop it and
그냥 좀 해!
JUST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