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둘째 주
1천여 종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나무 중에 이보다 더 큰 잎사귀를 갖는 나무는 없다. 오동나무는 15~20년이면 쓸만한 재목이 된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나 되어야 겨우 ‘나무구실’을 하는 보통의 다른 나무들이 눈 흘기고 질투할 만하다. 그야말로 ‘슈퍼 트리’이다. 그래서 자람의 속도에 비하여 훨씬 단단한 나무가 된다. 습기를 빨아들이는 성질도 적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성질까지 있다. 당연히 쓰임새가 넓어서 생활용품에 오동나무가 쓰이지 않은 곳이 없다. 악기를 만들 때 공명판의 기능은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널 볼 수도 없을 만큼 독보적이다. 가야금, 거문고, 비파 등 우리의 전통악기는 오동나무라야만 만들 수 있다. 조선시대 고급관리들이 오동나무를 탐내어 베어버렸다가 그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가문의 영광인 벼슬마저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나무는 한 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아. 차라리 말라죽을지라도 말이야. 나도 그런 나무가 되고 싶어. 이 사랑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도.
사자가 작은 임팔라를 잡기 위해 시속 7~80km로 전력투구를 다 하지만 사냥 성공률은 20%밖에 안 된다. 살기 위해 사자로부터 달아나는 동물의 필사적인 노력이 백수의 왕인 사자를 형편없는 사냥꾼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자는 이를 잘 알기에 작은 먹잇감을 사냥할 때도 전력투구를 다하는 것이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면 사자를 기다리는 건 배고픔과 죽음뿐이다.
악마는 항상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다. 파우스트가 무한한 즐거움과 지식을 얻으려고 기꺼이 자기 영혼을 바친 일이나 거장 로버트 존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주 실력을 위해 자기 영혼을 교환한 것 등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속에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거래하는 이들의 사례가 가득하다.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이해하라
코치들은 '자신감 있게 던지라'는 말을 하지만 정작 선수들은 그 뜻을 잘 모른다. 자신감 있게 던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라’는 것이다. 한 경기당 대략 300번의 공이 오간다. 그 속에서 언제나 의외의 상황이 생긴다. 승부는 그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해병대수사단장 박정훈 대령입니다.
오늘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너의 죽음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하겠다. 책임 있는 자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이 말은 제가 고 채수근 시신 앞에서 다짐하고 약속한 말입니다.
최근 채수근 상병 어머니의 편지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누가 내 아들을 구명조끼 없이 물에 들어가게 하였는가” “누가 그 세찬 물살에 장화를 신게 하였는가” 편지 속 어머니의 질문은 작년 7월 28일 제가 남원에서 유가족 대상 수사결과를 설명하였을 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1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어머니는 똑같은 질문을 하고 계시고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현실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병사의 죽음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80 평생을 살아보니 힘 있는 놈들 다 빠져나가고 힘없는 놈들만 처벌받더라” 이 말씀은 수근이 할아버지가 수사결과 설명을 하는 저에게 하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할아버지께 이런 약속을 드렸습니다. “비록 제가 수사종결권은 없지만 제 손을 떠나기 전까지 오늘 설명드린 대로 이뤄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도 하나밖에 없는 장손자를 잃고 억장이 무너진다는 할아버지의 눈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채수근 사망 사건은 군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지킬 만한 나라인가를 가늠하는 잣대다. 군사법원이 박정훈의 정의를 찾아줄 것인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박정훈의 정직이 항명으로 취급돼 처벌받는다면, 군사법원법을 무력화한 수사 외압이 덮이고 만다면, 또 다른 채수근을 막지 못하는 사회로 남는다면, 이 나라가 지킬 가치가 있겠는가.
나무야 나무야 서서 자는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다리 아프지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아주 많은 것을 잊으며 살아가는 중에도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왜 남아 있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기억들, 나의 선택으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나를 선택하여 남아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