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종욱 찾기」
유난히 바쁘고 정신없던 하루,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우나하듯 살이 조금 벌게질 정도의 온수로 샤워를 한다. 싱그러운 청귤 향과 드넓은 청보리밭의 풀 내음이 적당히 나는 로션을 몸에 살짝 바른다. 살에 엉기지 않게 고실고실한 통이 넓은 체크무늬 잠옷을 입고 침대에 몸을 내던진다.
눕자마자 잘 생각은 없었다. 오늘은 하얗고 파란빛보다는 약간 붉은 기가 도는 노란빛이 지친 몸과 정신에 편안함을 주기 좋을 것 같아 침대 옆에 놓인 조명 스위치를 켠다. 어째서인지 한 번에 켜지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두어 번 더 시도해보다 힘없이 숨 한번 내어 쉬고 그냥 잠이나 잔다.
아니, 괜히 아쉬운 마음에 다시 눈을 떠 정말 고장이 난 게 맞는지 다시 스위치를 딸깍거린다.
- 딸깍, 딸깍, 딸깍, 딸깍, 따...ㄹ.. 파지직!
살짝 주춤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을 다시 은근하게 비춘다.
어이없게 다시 빛을 내는 저 전구처럼 가끔 기억 저편에 있던 것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령 5년 전 우리가 헤어졌던 건 진짜로 헤어진 게 아니었으니 이제 정말 이별하자 말하는 태하와 그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빈 눈으로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여름이를 그린 드라마 장면이라던지, 사랑한다는 마음이 들 때쯤 맥락 없이 끝나 버린 짧은 연애에 촉촉한 눈으로 화를 내던 친구와 오랜 연애를 원만한 합의로 종료하고 이제 후회도 미련도 없다고 시원시원하게 말하면서도 멍하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던 내 맞은편 친구의 모습 같은 것들.
겪어보지 않고서는 잘 알지 못하는 탓인지 비슷한 일이라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예전에는 미처 이해하지 못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제야 어두운 저편에서 깜빡이는 게 보인다.
여느 날과 다름없던 하루 끝쯤, 비눗물 들어갈라 눈을 꾹 감고 샴푸로 감은 머리를 헹구는 중에 기억 저 멀리 있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어두운 눈 안에 어른거리는 장면은 지우가 벽에 기대어 자는 종욱에게 다가가 마치 손끝에 그를 남기려는 듯 감긴 그의 눈과 코 그리고 입을 살살 쓸어 어루만지는 장면이다. 하나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오묘했던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오늘따라 선명하다.
낭만적인 사랑의 시작, 끝이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에 소란스레 상승하는 마음에게 뜨거워지지 마라며 꾸역꾸역 다독이고 있었던 걸까. 시작의 종욱과 끝의 종욱이 다르다면 예뻤던 추억은 그저 기억으로 남길 수밖에 없으니 눈앞에 당신을 가끔 꺼내 추억할 수 있는 정도로만 남겨두자고 되뇌면서.
머리카락 끝으로 모이는 물줄기에 그와 종욱이 겹쳐 흐른다. 흔들거리는 그네의자에 나란히 앉아 노을 지는 가을빛에 물들어가는 파란 바다를 말없이 바라보던 때. 내 마음을 묻는 그에게 옅은 미소만을 지어 보이며 그 자리에 우릴 미완인 채로 남겨두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지금 여기에 나와 어디 그곳에 그는 어떤 형상일까. 이 아무것도 아니고 없는 순간, 기억의 모양으로 고이 접어 잘 감춰두었던 것이 빈틈 사이로 말릴 새 없이 추억으로 스쳐버렸다. 그리고 이제야 우린 미완의 형태로 그때 그 자리에 사라지고 말 작은 흔적만 남겼어야 했다고, 그게 가장 좋았을 법했다고 생각하다가 잠깐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소리가 점점 크다. 아무래도 남은 비눗물은 찬물로 헹궈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