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어쩌다 산책」
마로니에 공원 뒤, 복작복작한 대학로 거리에는 가려는 마음 없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서점이 있다.
건물과 주차장 사이에 지하로 향하는 바깥 계단을 찾아 내려간다. 주변 가게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는 점점 멎어가고, 잔잔하고 느린 피아노 연주곡이 귓가에 들린다. 괜히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셔 서가의 나무 향과 책의 종이 냄새를 맡는다.
「 무용하고 아름다운 시간,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서점을 추구합니다. 」
더위가 한풀 꺾이는 듯한 8월의 어느 여름날, 장롱 깊이 넣어 둔 가을옷을 어서 꺼내 입기만 기다리는 너에게 이 여름의 끝자락을 선물하려고 한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지만, 우리가 만난 이 계절을 기억해주었으면 해서.
적당한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서가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들고 있는 이 책만 남아있는 것 같다. 어느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던 여러 사람의 손길이 느껴져 선뜻 이 책을 선물하려니 망설여진다. 그래도 오롯이 여름만을 담은 책은 이것뿐이기에, 대신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해야겠다.
나풀거리는 하얀 유산지를 책에 두르고, 종이로 꼬아 만든 끈으로 리본을 묶는다. 화병에서 작은 꽃과 풀잎 가지들을 꺼내 리본 사이에 꽂아 마무리한다.
“새 책은 빳빳한 맛에 보는 건데, 서가에 한 권 밖에 남지 않은 책이라 벌써 손이 조금 탔어.”
- 좋은 책이란 증거라 합시다, 선물 고마워.
다시 여름을 시작하는 6월의 어느 날, 보라색 파라솔 밑 벤치에 앉아 지난여름 너에게 선물했던 그 책을 읽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문득 너는 어느 곳에 밑줄을 그었을까 궁금하다. 너의 눈은 어디에서 머물렀을지, 너의 펜은 어느 곳을 지나고 있었을지. 무의식에 너를 만나고 길을 잃었다.
이젠 모르는 사이가 되어 과연 너에게도 좋은 책이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때만큼은 너와 나의 펜이 나란히 같은 곳을 지나고 있었기를. 언젠가 이 책에 대한 느낌을 글로 써서 주겠다고 했으나 결국 수취하지 못한 편지, 아마도 무용하고 아름다운 글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여름의 시작에서, 지난여름의 끝자락을 회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