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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Jul 01. 2021

성산읍 고성리의 아침


2021년 1월 20일 수요일

  

오전 7시, 하얀 시폰 커튼에 주황빛이 물든다. 침대 발밑으로 꾸물꾸물 기어가 커튼을 연다. 광치기 해변의 수평선 위로 하늘이 파랗고, 성산 일출봉에 걸친 아침햇살이 넘실거리는 노란 유채꽃을 더욱 윤기나게 한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내일 비가 온다고 했다. 고로 나는 오늘 이 날씨를 아주 만끽할 것이다.

    



 “몸국 하나 주세요.”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집에서는 잘 먹지도 않는 아침이지만, 왠지 여행지에서는 누룽지라도 챙겨 먹게 된다. 어제 아침에는 고사리육개장을 먹었다. 삼삼한 맛에 뭉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찬 바람에 움츠렸던 몸을 녹이기 적당했다.      


김이 펄펄 나는 뚝배기에 찢은 닭가슴살과 모자반이 들어 있는 국이 나왔다. 이게 몸국인가 보다. 미역국과 시래깃국 중간의 느낌이다. 고사리육개장보다는 익숙한 맛에 올라갔던 어깨를 편안히 내리고 밥 한 술 크게 떠서 몸국에 말았다.     


주방 조리대에 팔을 걸치고 서 있던 사장님이 나에게 말을 건다.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우리 가게 처음 온 거 아니시죠?”

   - 네? 어제 제주도 처음 들어왔어요.     

  

  “정말요? 아닌데, 낯이 너무 익는데…."

   - 제가 워낙 흔한 얼굴이라서요, 하하.      


혼자 훌쩍 날아온 제주에서 처음으로 낯선 사람과 긴 대화를 한다. 나쁘지 않다. 일단 서먹하고 어색한 분위기는 사장님이 깨셨고, 진행도 뭔가 사장님이 하실 것 같다.    

 

  “어디서 왔어요?”

   - □□에서 왔어요.

     

  “□□? □□ 어느 곳에 사세요?”

   - 아, ○○이라는 곳에서 왔어요. (말씀드려도 어딘지 모르실 텐데)  

    

  “어머, 나 ○○동에 산 적 있어! 한 2년 정도?!”


세상 참 좁다.      


제주도에서 몸국은 언제 먹는 음식인지, 귤이 가장 맛있는 계절은 언제인지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남쪽 끝의 섬에서 육지의 서쪽 그것도 아주 작은 우리 동네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되다니.


나도 모르게 눈썹을 올려 눈을 크게 뜨고 전보다 높아진 목소리로 사장님의 첫 질문에 멋쩍게 대답했던 말을 수정한다.     


   - ○○에서 한 번쯤은 오며 가며 스쳤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제가 낯익었던 걸지도 몰라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사장님은 과거에 잠시 ○○ 있는 어느 직장을 다녔다. 일에 지쳐, 사람에 지쳐, 도시의 삶에 지쳐 제주가 너무나 그리웠던 그녀는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날 바다에 데려다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30 안에 바다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차는 그녀를 태우고 달려 인천항 근처 월미도 앞바다에서 멈췄다.


바다는 바다였다. 그럼 바다였지. 하지만 그녀는 차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게 바다야? 이걸 바다로 쳐주는 거야?”     


허탈하고 억울한 마음에 화가 나 터져 나온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풉- 웃어 버렸다. 투박하게 짙고 작은 바다를 그가 짠! 하고 보여주었을 때, 그녀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상상돼서 말이다.


아마도 그때 그녀가 봐야만 했던 바다는 그 흔한 제주의 바다처럼 감히 품에 담기 힘들 만큼 넓어서 앞만 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시야를 사방으로 트이게 하고, 파도가 바위에 부닥치며 내는 힘차고 거센소리로 시끄러운 속 정도는 가볍게 덮어줄 바다가 아니었을까.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생각보다 흥미로운 대화를 했다. 든든하게 채운 배를 두드리며 사장님이 챙겨주신 귤 주머니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이 날씨를 만끽하러 어디든 가봐야겠다.


일단 제주에 흔해 넘치는 바다부터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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