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주박물관 국보 무령왕릉 석수
국립공주박물관을 방문하면 건물을 들어가기도 전에 입구를 우뚝 지키고 서 있는 커다란 석상과 만나게 됩니다. 둥글둥글 뭉실뭉실 한 몸통에 짜리 몽땅한 다리를 가진 네 발 짐승. 입은 뭉툭하게 끝이 떨어지는데 살짝 헤벌린 모습이 마치 웃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앙증맞은 귀에 등에는 줄무늬, 몸에는 식물 줄기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고, 퉁퉁한 엉덩이에 꼬리를 바짝 붙이고 있어요. 머리에는 수사슴의 웅장한 뿔을 작게 축소해 둔 것만 같은 장식을 얹고 있네요. 분명 동물이긴 한데 돼지인지 하마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이 것은 석수, 혹은 진묘수라 불립니다.
꼭 안아주고 싶은 귀여운 외모로 공주박물관의 마스코트로 인기가 있지만 이 짐승의 본래 직업은 외모와 상반됩니다. 진묘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묘, 즉 무덤을 지키는 것이 본업인 셈이죠. 이 진묘수가 지키던 무덤의 주인은 백제 제25대 왕, 무령왕입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 한성을 빼앗기면서 개로왕이 전사, 백제는 지금의 공주로 천도하고 웅진시대를 열게 됩니다. 전쟁의 여파로 왕권이 떨어지고 국력이 쇠퇴해 혼란하던 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왕이 무령왕이죠. 백제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왕입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 중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사례입니다. 고분에서 발견된 2매의 ‘지석’ 덕분인데, 각각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과 백제국왕대비의 사망 일시와 토지신들로부터 묘터를 매입한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석에 새겨진 이 글귀 덕분에 무령왕릉에 안치된 인물이 무령왕과 왕비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또 무령왕릉은 1971년 발굴되기 이전에 도굴된 적이 없는 왕릉이기도 합니다. 비록 졸속 발굴로 회자되기는 하나 벽돌로 쌓은 전축분과 수천 점의 유물이 엄청난 발견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발굴 당시의 사진을 찾아보면 벽돌로 된 아치형의 무덤방 문을 연 발굴단원들이 가장 먼저 마주했던 진묘수를 볼 수 있습니다. 발굴에 참여했던 지건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무덤 입구를 촘촘히 막고 있던 벽돌 일부를 끄집어내자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희끄무레한 돌짐승이 보였다고 석수의 첫 모습을 회고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드러난 진묘수는 석수라는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공주박물관에 터를 잡게 되었습니다. 석수를 실제로 마주하면 전반적으로 녹회색인데 군데군데 표면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는 더 짙은 색을 띠기도 합니다. 입 주변부 위주로 붉게 칠해진 흔적이 나타나고 몸체 여기저기에 적갈색들도 보여 빛바랜 여러 색상들이 홀로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세월을 머금고 있습니다.
석수를 만드는데 사용된 돌은 과학적 분석 결과 각섬석암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각섬석암은 광물인 각섬석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심성암인데, 심성암은 마그마가 지각 깊은 곳에서 식어 만들어진 화성암의 일종입니다. 각섬석암에서 ‘석’자가 빠진 각섬암이라는 암석도 있는데 이것 역시 각섬석으로 이루어진 암석이지만, 이미 형성된 암석이 변성작용을 받아 만들어진 변성암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 각섬석암은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구성된 공주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암석이라는 점이 석수의 제작에 관한 궁금증을 가지게 합니다. 석수의 크기는 높이 약 31cm, 길이 49cm, 너비 22cm. 이 정도 크기의 석물을 제작하려면 재료가 되는 돌덩어리는 훨씬 커야 했을 터니 주워온 돌 정도가 아니라 노출된 암반에서 재료를 얻어야 했을 것입니다. 공주에서 그나마 가까운 각섬석암 분포지는 100km 이상 떨어진 전라북도 장수 일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명 ‘장수 곱돌’로 불리는 이 각섬석암으로 지금 우리는 불판을 만들어 고기도 구워 먹고 돌솥을 만들어 지글지글 밥도 야무지게 비벼먹는데, 어쩌면 조상님들이 무령왕릉을 지켜달라는 염원을 담아 같은 돌로 석수를 조각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거리가 아무리 멀더라도 무령왕릉과 관련된 일이니 재료를 조달하는 일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왜 각섬석암이어야 했을까요. 공주 지반을 구성하는 화강암이나 편마암은 왜 재료로 쓰이지 않은 걸까요. 석수 표면에 채색한 흔적이 있기 때문에 각섬석암의 고유한 색상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석수뿐만 아니라 왕릉의 주인을 알게 해 준 지석 역시 같은 암석이라고 하니 어쩌면 장수 지역의 지방 세력이 왕릉을 축조한다는 소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석수를 만든 각섬석암의 원산지가 장수가 아닌 또 다른 지역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모체가 되는 암반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이 같은 모암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려면 화학원소 함량을 비롯한 여러 분석을 해보아야 하는데 석수와 장수곱돌을 구체적으로 비교한 사례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각섬석암은 비교적 가공성이 뛰어나 지석의 글씨를 새기고 석수의 형상을 빚어내기에는 적합했을 것입니다.
무령왕릉은 안전한 보존관리를 위해 1997년 이래로 내부 관람이 폐쇄된 상태입니다. 왕릉을 지키던 석수와 지석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은 공주박물관을 새 보금자리로 삼게 되었죠. 원 위치가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왕릉원(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옛 명칭 공주 송산리고분군)이고, 또 다른 모습으로 무령왕릉의 부장품들이 옮겨간 거처인 박물관 입구를 지키고 있기도 하니 진묘수는 아직 열심히 제 본분을 지키고 있는 셈입니다.
[참고자료]
∙ 지건길, 2012, 고고학과 박물관 그리고 나. 학연문학사.
∙ 박준형, 이찬희, 최기은, 2017, 백제 무령왕릉 석수와 지석의 재질 및 표면손상 특성. 보존과학회지, 33(4), pp.241-254
∙ e뮤지엄
[사진출처]
∙ 커버이미지, 공주박물관 전경: 직접촬영
∙ 본문의 석수: e뮤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