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또다른 영구미제 사건,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앞에서 이야기 했던 이형호군 납치 살해 사건과 더불어 영구 미제로 남은 또하나의 사건이 바로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이다.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들 5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아이들은 우철원(14), 조호연(13), 김영규(12), 박찬인(11), 김종식(10)이었다. 동네의 와룡산에 올라가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갔던 아이들은 언론에서 개구리를 잡으러 간 것으로 표현하며 일명 '개구리 소년들'로 알려지게 되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이들이 산에 간 날은 지방선거일로 임시 공휴일이었기에 조호연의 집에 모여 함께 놀고 있다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 와룡산으로 향한다. 당시엔 원래 김태룡(10)까지 6명이었지만 그는 어머니께서 멀리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라 따라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다른 5명의 아이들은 와룡산으로 향하던 중 조호연의 형인 조무연(15)을 만나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고, 조무연을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또한 우철원과 같은 반 친구였던 김경열, 이태석 등도 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만났다고 진술했으며, 시내에서 파출부로 일하던 김순남씨 역시 이들이 와룡산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와룡산 기슭에 살던 김이수 아주머니 역시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했으며, 이후 아이들을 본 사람은 없었다.
오직 같은 학교에 다니던 4학년 함승훈만이 자신도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다른 동네 형들과 있었는데, "산 위쪽에서 10초 정도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병 소리를 두 번 들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함께 갔던 동네 형들은 아무도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아무튼 와룡산에 간 아이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은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자 저녁 6시 경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쳤고, 결국 저녁 7시 50분 경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후 경찰까지 동원되어 부모들과 함께 새벽 3시까지 산을 수색했지만 아이들을 찾지는 못했다.
이후 경찰들은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데, 5명 아이들이 모두 가정 불화 때문에 가출을 했고 그러다 앵벌이 조직에 잡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엉뚱한 판단으로 인해 수사는 늦어졌고, 그러다가 이 사건이 매스컴에 소개 되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와룡산 일대는 물론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사건을 담당하던 대구지방 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될 때까지 연간 30만 명의 군인과 경찰을 동원해 산악 수색 48차례, 일제 검문 43차례,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 곳, 가정집 11,000세대 등을 수색했으며, 570여 건의 제보를 확인했지만 모두 불발로 돌아갔다. 이와중에도 경찰은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아이들을 집에 암매장했다고 추측하여 집을 모두 파헤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년들을 찾자는 사회적 의지는 대단했기에 각 분야의 기업들이 나서서 당시 아이들이 즐겨보던 만화나 비디오 테이프에는 이 소년들을 찾는 광고가 들어갔고, 우유나 과자 포장 등에도 이 소년들을 찾기 위한 광고가 들어갔다.
포항제철은 현상금 1천만원을 기탁했고, 전단 8만 장을 인쇄하여 노동자와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 역시 대한항공과 한진고속의 직원과 승객들을 대상으로 100만 장의 실종자 전단지를 뿌리는 등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이 소년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영화와 노래 등으로도 만들어졌으며, <생방송 여론광장>, <그것이 알고 싶다>, <사건 25시> 등에서 사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아이들은 찾아내지 못했고 1993년 1월 부모들의 탄원서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9월 경찰은 직접적인 수색을 중단했다. 1995년 경찰은 컴퓨터로 가상 몽타주를 만들어 전단 2만 장을 만들어 뿌렸고, 결국 96년 경찰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업무를 달서 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이관했다.
그러다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랐던 오씨가 아이들 5명의 유골을 발견해 신고하며 5명의 소년은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도 경찰은 문제를 일으킨다.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도 않고, 과학 수사대를 부르지도 않은채 자기들끼라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서 현장을 훼손 시켰으며, 의경들이 삽질을 하면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 버렸다. 그리고 현장감식이나 부검 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들에게 타살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조난을 당했던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 등의 주장을 했다가 거센 반발을 받기도 했다.
겨우 부검을 실시한 법의학자들은 둥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으로 유추했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이나 범죄 도구를 특정하지는 못했다.
결국 2003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 했으며, 2005년 유족들은 공소시효 폐지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2006년 3월 26일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리고 2015년에는 내사마저 종결되며 이제는 범인이 누군지 밝혀져도 처벌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당시에는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온갖 음모론이 돌았다. 근처에 있던 군부대 실탄 사격장의 오발 사고로 인해 죽었다는 루머, 그 산을 거점으로 삼던 동네 불량배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루머, 북한 남파 간첩이 아이들을 납북하려다가 반항하자 살해했다는 루머, 아이들의 학교 선생님이 범인일 것이라는 루머, 그리고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씨가 범인이라는 루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믿을만한 것은 없다. 사건이 발생한지 31년, 아이들의 시신인 발견된지도 1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아이들을 누가? 왜? 어떻게? 죽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부디 바라건데 꼭 잡혀서 그 엄청난 죄의 댓가를 받기를....아니면 살아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그 댓가를 받기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