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오대양을 이끌던 박선자와 집단 변사 사건
이미 사이비교의 무서움과 무지함에 대해 '백백교' 사건을 통해 살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사이비교의 만행은 오늘 이야기할 '오대양' 사건에서도 이어진다.
오대양은 박선자가 세운 사이비 종교인데, 우선 박선자는 35살이 되던 1974년 횡격막에 이상이 생기며 고통을 받았으나 그것이 치료되는 경험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신이 자신과 함께 한다고 믿게된 그녀는 신학교에 입한한 뒤,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대표적 이단으로 손꼽는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했다. 또한, 훗날 세월호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유병언의 <구원파>에도 출석하며 자신만의 교리를 만들어갔다.
1984년 5월, 박선자는 구원파의 인원 몇 명을 이끌고 자신이 만든 종말론 종교인 <오대양>을 만들며 동명의 회사를 설립한다. 이 '오대양'이란 이름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는 의미라고 한다.
오대양은 민속공예품을 만드는 회사로 시작했으나 이후 수입품 판매점을 열며 사업을 확장했고, 1988년에는 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이후 점점 사업을 확장하며 대전과 용인에도 공장을 마련했고, 유치원과 양로원,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주며 사회 사업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는 남성들도 어려웠던 사업을 성공시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당시 여성들의 워너비로 평판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보면 그 내면은 추악했다. 우선 그녀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아이들은 모두 신도들의 자녀를 고아로 위장한 것이며, 그녀는 그 아이들에게 "너희에게 부모는 없고,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다"라고 세뇌를 시켰다. 양로원의 노인들 역시 신도들의 부모였다.
또한, 신도와 그 가족들을 모두 집단으로 생활하게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그 행적을 보고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1달에 1번 '반성의 시간'이란 것을 마련해서 본인 스스로 규율을 어긴 것을 실토하거나 주변인들이 고발을 해서 집단 구타를 벌이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죽기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지만 실제적으로 이 회사의 매출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생활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신도들은 이런 박선자를 완벽히 믿었으며 가족 사이의 관계를 끊기 위해 자녀들이 부모들을 폭행하도록 시켰음에도 이들은 순순히 여기에 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무지한 생활은 계속될 수 없었다. 1986년 일본의 한 전자 부품회사와 합작을 하기위해 7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했지만, 이것은 사기꾼들의 사기였다. 결국 이 손해를 메꾸기 위해 박선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끌어오라고 명령했고, 신도들은 여기 저기에서 돈을 빌려다 박선자에게 바쳤다. 이때 박선자가 끌어모은 돈이 170억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신도들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빚이었고, 빚을 갚지 못한 박선자에게 약 5억을 빌려준 이상배란 인물이 찾아가 빚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일이 벌어졌다(1987.8). 이상배의 딸 부부도 오대양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선자는 오히려 그의 딸을 비롯한 신도들을 시켜 이상배를 집단구타했을 뿐만아니라, 채무포기각서까지 쓰게 만든다. 이상배는 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실리면서 다른 채권자들도 너도나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하며 박순자는 코너에 몰리게 되었다.
어차피 돈은 갚을 능력이 없었으며, 경찰과 언론까지 압박을 하자 박순자는 신도들과 자신의 가족 80여 명을 오대양 용인 공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 그리고 투자금을 가장 많이 끌어모았던 인물까지 총 32명을 선발해 식당 건물 천장에 마련해둔 공간에 올려보내고 나머지는 공장 창고 구석에 숨도록 한다.
얼마 뒤인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회사의 직원이었던 김씨는 용인 공장에 갔다가 내려앉은 천장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식당 쪽으로 향했고, 거기서 죽어있는 박선자와 31명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침 가족을 찾으러 왔던 박선자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남편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 날에는 용인 공장을 수색하던 경찰에게 창고 구석에 숨어있던 49명이 발견되어 무사히 구조되었기에 경찰들은 식당 천장까지는 확인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경찰들은 식당 천장의 시신들이 무척 기괴한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식당 천장의 빈 공간에는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의 시신들이 각각 19명씩, 12명씩 이불처럼 포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장장 역시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매고 죽어있었다.
경찰들은 당시 현장에 있던 메모의 내용을 통해 사건 당시 음독을 통해 죽었다고 짐작했었다고 한다.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
"OO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OO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부검 결과 이들은 모두 독극물이 아닌 신경안정제 성분만이 발견되었고, 사인 역시 경부압박에 의한 교살이었다고 밝혀졌으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교살에 저항한 흔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경찰은 박선자가 먼저 공장장(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하게 시키고, 그뒤로 다른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멀미약 등의 신경안정제를 복용한 상태에서 이경수에 의해 목이 졸려서 자의적인 타살을 당했으며, 이후 이경수가 시신들을 쌓아 놓은 뒤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물론 단순한 박선자에 대한 믿음만으로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는 볼 수 없다. 식당 천장에서 4일 이상 숨어 있으며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특히나 이들 31명은 박선자를 열렬히 추종하던 인물들이었기에 박선자를 위해 모두 3~4억 이상 빚을 진 상태였다. 당시 가치를 현재 가치로 환산해 보면 약 10배 이상 차이가 날 것으로 보이니 30~40억 가량의 빚을 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믿고 따르던 교주마저 허무하게 죽고, 자신은 수십억의 빚쟁이가 되고 말아서 삶을 포기했던 측면이 크다고 보여진다.
이후 1991년 수배중이던 11명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며 검찰 역시 이 사건을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내리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를 신이라 내세우는 경우 그것은 결국 사이비이다. 그리고 사이비의 결말은 결국 허무하며 허탈하게 끝이 난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스스로가 구원자이고 신이라고 떠벌리는 인물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 길에서 벗어나길 간절하게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