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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갈곳이 없어지는 곳’으로 지어야 할 단독주택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김정관의 단독주택 인문학' 에필로그

by 김정관

33회로 예정하고 연재해 왔던 ‘단독주택 인문학’이 이번 글로 마무리된다. 격주로 쓰는 글이지만 늘 마감에 쫓기다시피 쓰게 되어 부실한 내용이 되었으니 독자들께 송구한 마음이다. 단독주택을 오래 설계하면서 내가 작업한 집에서 건축주 식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끔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건축주와 통화를 하면서 사는 얘기를 듣고 있다. 좋은 집에 살게 해 줘서 고맙다는 얘길 전해 들으며 행복은 집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믿는 소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게 된다.


‘단독주택 인문학’이라는 내용으로 연재 글을 쓰게 되었던 건 단독주택은 ‘어떤 집’이기보다 ‘어떻게 살 집’으로 지어야 되기 때문이다. 처칠 경이 말했다고 하는 ‘우리가 집을 짓지만 나중에는 그 집이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말씀을 새겨본다. 특히 단독주택은 우리네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므로 우리 식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집이라는 바람을 담아 설계를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집’은 물리적인 집-House에 대한 것이며 ‘어떻게 살 집’은 가정-Home을 만드는 것이므로 오롯이 건축주의 몫이라서 삶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기 때문이다.


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우리는 누구나 집에 산다. 바깥에서 지내다가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지내다가 잠깐 밖으로 나간다. 바깥에서 잠깐 볼 일을 보고 집으로 돌어간다. 그래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 그곳이 집이다. - 이갑수, 오십의 발견


집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이라고 한 작가의 글에 격하게 공감한다. 집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곳’이어야 하는데도 갈 데를 찾아 방황하고 있는 게 우리들의 삶이 되어 버린 듯해서 안타깝다. 지난 글에서 몇 차례 언급했지만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면 늦은 밤인데도 불이 켜지지 않은 집이 많다. 식구들이 아무도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된장찌개에 반찬 몇 가지로 차린 단출한 밥상, 식구들과 먹는 밥은 메뉴를 따로 정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값비싼 요리라고 할지라도 엄마가 차린 밥상만큼 맛있을 수 없을 것이다.


‘밥은 먹고 다니니?’라는 어느 광고의 멘트에 울컥해지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식구들의 귀가 시간이 달라서 한 자리에 앉아 저녁밥도 먹을 수 없다. 주말이나 휴일에도 약속을 해야 식구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실정이다. 한 집에 사는 가족은 있어도 밥을 같이 먹는 식구가 없으니 화목한 가정이라고 쓸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될까?


집에서 식구들의 일상이 이루어져야만 가족사(家族史)가 만들어지게 된다. 아이들이 독립해 나가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어도 성장기의 추억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가족사에 대한 회기본능(回期本能)으로 부모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님을 그리워할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은 오직 집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내 집이 아니라 ‘우리집’인데 우리는 어디에?


손님이 오지 않는 지금의 우리네 집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행복과 무관할까?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우리네 주거 생활은 우리라는 개념이 옅어져서 개인화되고 말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손님 대접에 정성을 다하는 게 미덕이었다. 집을 떠나 멀리 갈 일이 있으면 친척집이나 친구를 찾아 하룻밤 묵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부모가 자식을 찾아도 잠 잘 곳은 숙박시설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는 건 아파트에는 손님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출가한 자식들도 부모를 찾아도 하룻밤을 지내는 게 어려운 건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니 부모를 찾아뵙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부모도, 자식도 손님인 이상 남의 집을 찾아 하룻밤을 묵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는 어떻게 혈연의 정을 나누면서 가까운 사이로 지낼 수 있을까?


KakaoTalk_20251030_093846321.jpg 가족들이 아무도 돌아오지 않아 불이 꺼진 집을 바라본다. 밖에서 볼 일이 마쳐지면 돌아가야 할 곳이 집인데 아무도 없는 집은 가족들에게 어떤 곳일까?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나면 집에서 독립하는 건 어느 집을 막론하고 일어나게 되는 일이다. 아이가 집을 나가 살게 되면 부모가 각방 쓰기에 들어가면서 방주인이 바뀌게 된다. 이제 아이는 집에 다니러 오더라도 제 방이 없어서 손님 신세가 되고 만다. 손님이 된 아이는 부모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방학에도 며칠 머무는 게 불편하게 되고 만다.


손님이 올 수 없는, 손님이 찾아오지 않게 되면서 자식들과 멀어지게 된 집이 분명 우리네 삶을 외롭게 만들고 있다. 식구로 살지 못하면서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지키지 못하는 집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손님을 흔쾌히 맞이하고 편히 하룻밤 묵어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 행복이 샘 솟아나는 집이라 할 것이다.


부부만 남은 집에서 방을 따로 쓰게 되면


혼자 집을 쓰는 1인 가구가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34.5%라고 한다. 2019년에 30%를 넘어서더니 2020년대 들어서는 심각한 저출생과 맞물려 1인 가구가 급증하는 추세이다. 1인 가구가 아니면 대부분 부부만 사는 2인 가구일 테니 외로움이 사회적 질환인 건 통계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부부만 살게 되는 건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면 부모를 떠나 홀로 살기에 들어간다고 한다. 나이로 보면 늦어도 오십 대일 테니 그 이후의 삶을 부부로 살다가 어느 때가 되면 홀로 여생을 보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부부가 방을 따로 쓰는 게 보통이라고 하니 1인 가구나 다름없이 살고 있는 셈이다.


KakaoTalk_20251030_094003188.jpg 부산 원도심은 산복도로를 끼고 지어졌던 오래된 집들이 점점 비워지고 있다. 그 옛날 이 집들에는 예닐곱 식구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으로 오손도손 모여 살았다.


어차피 방이 남으니 잠을 따로 자는 건 괜찮지만 대화 없이 지내게 되는 게 문제이다. 부부가 다투게 되어 대화가 끊어져도 욕실이 밖에 나와 있으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안방을 쓰는 사람은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니 며칠씩 말을 섞지 못할 수도 있다. 부부가 한 집에 살아도 대화가 없으면 혼자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이 시대의 사람들이 외로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원인이 아파트라고 하면 과언일까? 만약에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우리는 식구와 손님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집다운 집에 살지 못하는 셈이다. 만약에 집에 대한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단독주택을 지어 살고 싶다면 설계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집을 짓고 나중에는 그 집이 우리를 만들어간다’고 했던 처칠의 말씀에 귀 기울여봐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 버렸지만 집은 누구에게나 당연히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지는 곳’이었다. 스마트폰은커녕 집 전화도 없던 시절에는 일이 마쳐지는 대로 귀가하는 게 당연했었다. 식구 중 누구라도 귀가 시간이 늦으면 기다렸다가 늦은 저녁밥을 먹는 게 당연했었다. 그렇게 집은 누구에게나 돌아가야 할 곳이었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식구들이 있었다.


지금은 식구라는 말이 무색하게 함께 밥을 먹는 게 드문 일이 되고 있다. 바깥일이 마쳐지는 대로 마땅히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돌아가는 곳이 집이 아닌가 싶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집을 떠나는 아이, 부모와 살지 않아 부부만 살고 있는 집은 식구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집은 어떤 곳일까?



여성경제신문 '더봄' 연재 - '김정관의 단독주택 인문학' 에필로그

원문 읽기 : https://www.woman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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