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꼴의 봄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를 보고

by 노정희


나는 서울시 강북구 빨래골에 살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수유1동이었지만 동네 이름은 빨래골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꽤 오래 살았던 동네다. 수유역에서 부터 집까지 다니는 작은 마을버스에도 빨래골행이라고 크게 붙어 있었다. 좁은 골목길에 비해 몸집이 큰 마을버스는 뒤뚱거리며 움직였다.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했던 비디오 대여점이었고, 뒤를 돌면 허름한 야채가게를 낀 야트막한 오르막길 있었다. 골목길 양 쪽에는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있었고 오르막길 위 두 번째 집이 우리 집이었다. 세월의 흔적대로 녹이 슨 철제 대문은 진한 청색, 녹색, 회색 등이었고 대체로 굳게 닫혀 있기 보다는 얼굴을 빼꼼히 내밀면 안 살림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조금씩 열려 있었다. 대조적으로 담벼락 위에는 어떤 도둑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쇠꼬챙이, 깨진 유리조각 박혀 있는 집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쇠꼬챙이 집이었는 데, 가끔씩 열쇠를 깜빡하고 나온 나는 앞집 할머니의 도움으로 쇠꼬챙이 담벼락을 넘었다. 담벼락을 넘다 엉덩이를 찔려 바지가 찢어질 때도 있었고, 교복 치마가 찢어진 적도 있었다.


앞집 할머니는 화투를 참 좋아하셨다. 소일거리로 치는 화투에도 온 정열을 쏟아 부우 시는 할머니는 조금이라도 돈을 잃으면 소리를 빽 지르시며 화투판을 업고 집에 가셨다. 하지만 평소에는 자상한 편이셨다.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앞집 할머니는 가끔씩 침개를 부쳐서 우리 집에도 가져다주셨는 데, 별 것 들어가지 않은 부침개인데도 기름기가 촉촉하게 밴 것이 그렇게 고소하고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손으로 부침개를 쭉쭉 찢어먹고 손을 쪽쪽 빨고선 옷 위에 스윽 닦았다. 지금 우리 아들이 그랬다간 당장이라도 나의 등짝 스매싱을 피할 수 없다.


우리 집 뒤로 집 한 채가 더 있었고, 그 뒤로는 야산 언덕을 넘어 경사가 급한 산동네로 이어졌다. 입구에는 아주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시끌벅적한 낮 시간이 지나고 조용한 밤이 되면 아카시아 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온 동네를 휘감았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올 때 은은한 그 향기가 참 좋았다.


우리 동네를 벗어나 약수터 쪽으로 더 올라가면, 계곡물이 참 맑고 깨끗했다. 맑고 깨끗한 계곡물에 옛날 임금님의 옷을 빨았다 하여 빨래골이라는 동네 이름이 붙었다고 했다.

빨래꼴 근처에 화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조그만 여자 중학교를 다녔다. 오르막 길을 오를 때는 헉헉 소리가 나고 종아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어떤 고약한 선생님께서 만들어 놓은 규칙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검은색 불투명 스타킹에 하얀색 양말을 신어야 했다. 다리가 날씬한 아이들은 큰 문제가 없었는데, 흰색과 검은색의 극명한 대조로 인하여 나의 굵은 종아리가 두드러져 보여 왠지 부끄러웠다.


나의 중학교는 1학년 교실과 2, 3학년 교실의 건물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 1학년 교실은 정문에서 바로 왼쪽으로 꺾어지는 건물에 있었는데 교실 안에서는 운동장 대신에 스탠드가 보였다. 스탠드 위로 나란히 심어져 있는 굵직한 벚꽃나무는 봄이 되면 엄청난 양의 벚꽃 비를 흩뿌렸다. 운 좋게 창가 옆에 앉게 되면 떨어지는 벚꽃을 구경하느라 선생님의 말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수업시간에 턱을 괴고 바라본 숨이 막히게 아름다웠던 벚꽃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


슬슬 봄이 오려나 보다. 나무 가지가지마다 연약한 연두색 봉오리가 솟아나고 바람도 겨울과 좀 달라졌다. 여전히 쌀쌀하지만 두꺼운 잠바는 입기가 민망하다. 봄에 대한 예의인지 지긋지긋한 겨울을 떨쳐내고 싶은 건지, 아줌마가 된 나는 멋보다는 편한 게 제일이라면서 사놓은 어두운 색 계열의 외투 몇 개 중에서 봄에 그나마 잘 어울릴 만한 것을 찾으려 이리저리 뒤적인다. 역시 봄은 봄인가 보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일본 국민 배우 키키 키린이 내뱉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