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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진 Apr 13. 2024

<싸이보그지만 괜찮아>후기

                                                                  *스포주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영화의 제목대로 영화의 주요 인물에는 ‘영군’이라는 싸이보그가 나온다. 영군은 싸이보그다. 그러나 온전하지 않은.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아니, ‘착각’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도입에서 영군은 자신의 손목을 칼로 그어 상처에 전선을 집어넣고 감전을 통한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하지만 싸이보그인 영군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자살이 아닌 ‘충전’을 위한 행위였다. 감전을 당했을 때 영군이의 발톱이 무지갯빛으로 점등한다. 그것을 보고 ‘싸이보그인 영군’이 충전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도입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영화 감상의 핵심 포인트는 ‘사람’과 ‘싸이보그’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차이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자살시도를 한 영군은 정신병원에서 눈을 뜬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다. 정신병원에는 정신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이 있다. 흔히 정신병원 환자들을 생각하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어 남들과는 다른 행동과 사고방식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영군이 자신을 싸이보그라고 믿는 것처럼 일반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다면, 나는 이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영군에게는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는 쥐다. 정확히는 영군과 마찬가지로 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하얀맨들에게 신고한 엄마 때문에 할머니는 그들에게 잡혀 정신병원에 끌려갔다. 여기서 하얀맨들은 의사들이다. 할머니는 틀니도 챙기지 못하고 하얀맨들에게 잡혀갔다. 틀니가 없으면 할머니는 무를 먹지 못한다. 이가 빠진 쥐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처럼, 할머니에게는 틀니가 필요했다. 할머니에게 틀니를 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앰뷸런스를 따라가 보지만 차마 따라잡지 못하는 영군. 자전거가 영군에게 말을 건다. “싸이보그는 다 이긴다.” 영군은 자신이 싸이보그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얀맨들을 향해 복수를 꿈꾼다. 하얀맨들을 무찌르고 할머니에게 틀니를 주는 것. 그것이 영군의 바람이다. 그러나 영군은 충전에 실패하고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당연하다. 실제로 싸이보그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점에서 영군의 충전은 자살과 같은 행동이다. 인간은 음식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그러나 영군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다. 싸이보그가 음식을 섭취하게 된다면 고장 나기 때문이다. 하얀맨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충전이 필요하다. 충전만 한다면 영군은 하얀맨들을 학살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군은 싸이보그니깐. 그러나 충전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싸이보그는 가지면 안 되는 감정들을 영군은 가지고 있었다. 바로 ‘동정심’이다. 자신이 점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일순’이라는 남자가 있다. 일순은 점이 되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과 정체성, 감정 등을 훔친다. 영군은 일순에게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가 달라고 부탁한다. 일순에게 동정심을 빼앗긴 영군은 하얀맨들을 향한 학살을 시도했지만, 아직 충전이 되지 않은 싸이보그 영군은 하얀맨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결국 오랫동안 음식을 먹지 못한 영군은 기절하게 된다. 영군의 복수를 위해서는 충전을 해결해야만 했다.

  영군의 충전을 도와주는 인물 역시 일순이다. 일순은 영군을 분석하고 영군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순은 ‘인간 영군’이 아닌, ‘싸이보그 영군’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영군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일순은 영군이 밥을 먹지 않는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영군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개조하여 영군의 몸속에 결합시킨다. 일순에게 ‘물건’이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이다. 소중한 물건을 영군에게 온전히 영군을 이해함과 동시에 영군을 향한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사랑. 그것은 세상 어떤 감정보다 진하고 선명하며 강한 힘을 가진 감정이다. 일순의 사랑 덕분에 영군은 무사히 밥을 먹고 충전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하얀맨들을 향해 복수를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영군은 할머니를 자주 목격한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영군에게 “존재의 목적”을 말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만났을 땐 할머니는 하늘에 점이 되어 날아간다. 할머니가 죽고 싸이보그 영군의 ‘임무’는 종결이 난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까지 할머니가 말한 ‘존재의 목적’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는 영군은 할머니의 입모양을 통해 일순과 함께 해석한다. 할머니가 말한 영군의 존재의 목적은, “넌 핵폭탄. 존재의 목적은 세상의 십억볼트 필요.” 할머니의 말을 따라 영화의 끝에 영군은 일순과 함께 천둥 치는 비 오는 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라디오 안테나를 끝까지 올려 천둥 맞기를 기다린다. 이것은 ‘충전’일까. 영화 도입부에 나온 영군도 같은 행동을 한다. 그날도 천둥 치는 비 오는 날을 보여준다. 같은 날씨와 같은 행동이다. 그러나 영군의 옆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일순이 있다.

  둘은 끝내 천둥을 맞지 못하고 젖은 옷을 벗고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함께 하늘 위에 무지개가 떠오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작품 속에서 영군은 충전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막바지 까지도 영군의 행동은 도입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보여준다. 충전을 하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영군의 발톱. 그러나 도입부와 다르게 충전하지 않아도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오른다. 일순과 ‘사랑’을 나누는 영군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군의 존재의 목적은 어쩌면 사랑,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닌 ‘영군’이다. 작품에서 일순이 영군에게 말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라고. 정신병원 환자들은 사회에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 소수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영화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당신이 무엇이든 괜찮다고. 희망을 버리고 살아도 괜찮은 것이 인생이 아닐까. 영화는 말한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의 의미는 결국 남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아니, 소수자들의 정의부터가 어떻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영군이 정말 싸이보그더라도 영화의 결말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존재가 무엇이든 똑같이 살아간다. 그런 것이 삶이다. 찬란하게 하늘을 채우는 무지개가 우리 모두의 존재에 대해 결말을 내려주었다. 나는 환자들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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