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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진 Mar 20. 2024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국제 행복의 날


  인간은 무엇을 좇고 살아가는 걸까. 단순한 쾌락과 행복의 정의는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단면적으로만 바라본다면 둘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대학교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진 것이 기억난다.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는 수만 가지 생각을 통해서 나름의 행복에 대한 정의를 머릿속에 그렸다. 내가 생각한 행복의 정의는 이랬다. 행복이란, 성취감과도 같아서 행복하고자 한다면 끝없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취감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샤프심을 작은 샤프심 입구에 넣었다던가 하는 그런 사소한 일 모두 성취라는 것이다. 어릴 적엔 분명 그랬을 것이라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취감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것이고, 이제는 샤프심을 통과해도 처음과 같은 성취감은 느낄 수 없을 것이라는 거다. 우리는 본래 말을 못 하는 아기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큰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익숙해지면 무뎌지는 것. 이것이 단순한 쾌락과 다른 것이라 말한다면 나는 둘 관계에 대해 어떠한 식으로도 차별성을 찾지 못하겠다. 모든 인간이 행복을 찾는 방법은 모든 사람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라는 정의가 나왔다. 행복은 앞으로 다가올 것도 아니고, 지금도 주변에 항상 존재해 온다. 당신의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행복이란 그런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행복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질문 속에는 ‘행복‘도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존재했다. 발전을 원하고 편리성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면 결국은 행복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은 눈앞의 단순한 쾌락에만 의존해 본능대로만 살아간다면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변수가 너무나 많고, 그 시작과 끝은 나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본능이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이지만, 누군가의 자유 속에는 누군가는 구속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우리는 모두 살아갈 권리는 얻었다. 인간의 평등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남에게 해를 입힌다. 악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물의 행동을 본다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생명체는 살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제일 강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남을 해하게 되어도 어찌할 수 없다고, 살아가기 위해서 행복과 쾌락을 무조건 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본능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찌하고자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런 말들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것조차도 인간의 본능 중에 존재하는 반응일 것이라고, 인간의 행복은 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것이라고…. 다 웃기는 소리. 쾌락은 결핍된 것이 채워졌을 때 일어나는 일시적인 반응이다. 행복은 그런 반응 자체를 가늠할 수 없을 조차 가득 담은 ‘무언가’다. 애초에 행복이라는 것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생명을 얻었다면 언젠가 잃게 될 것이지만, 죽음이라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는 쾌락 따위가 아닌, 행복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웃으며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생명이 세상을 통해 행복을 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가시적인 형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쾌락과 행복을 구하는 법이 아닌, 쾌락과 행복을 구별하는 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한 내가 내린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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