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교육의 형태는 무엇일까. 여백과 감정만이 가득한 생명에게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이 온전히 자리 잡기 위해 경험을 밟는다. 지식이 지혜가 되는 순간이다. 지식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고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지혜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지혜가 있다. 세상이라는 환경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혜가 있는 반면, 세상에 놓아진 나에게 필요로 하지 않는 지혜도 다분하다. 우리는 타인이 가진 지혜를 거부한다. 아니, 사실은 귀를 닫는다.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 왜일까.
타인이 지혜를 전하는 행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훈, 잔소리의 형태로 보인다. 어른의 말이라고 모두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몸이 기억한다. 왜인지 듣기 싫은 어른들의 말은 우리의 감정을 억제하는 옛날의 기억 때문일까. 우리는 어른의 지혜를 듣지 않는다. 무시받아 마땅한 말들도 다분하지만, 무시받을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할 일도 필요는 없다는 것.
누군가를 무시하는 것은 어쩌면 옳은 지혜로부터 도망가는 행위로 연결되기도 한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존재한다. 이성을 무시하고 오롯이 감정의 통제로 뱉은 말들은 지혜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교훈이 아니며, 잔소리라고 볼 수도 없는, 말보다는 울분에 가까운 형태라고 본다. 즉, 소통과는 거리가 많이 멀다. 어린아이들이 이와 같은 행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지혜가 없다.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시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명의 모습이지만 사람이라면, 감정을 다스리고 이성적으로 대화하며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 관계는 서로에게 필요성을 느낄 때 나타나는 형태다.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동질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관계고, 이로운 관계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다.
나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 순수하고 작은 아이에게 세상의 지식을 지혜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을 주어주고 싶고, 본인의 지혜뿐만 아니라 타인의 지혜 또한 존중받을, 나아가 타인마저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