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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an 03. 2023

처음부터 없었던 것

수많은 미혼모의 딸들에게

온갖 매체에서 그려지는 미혼모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동백’처럼 자식을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고 애지중지 잘 키워내고자 노력하는 훌륭한 어머니상이다. 둘째는 자신의 뒤틀린 인생을 저주하며 자식을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학대를 가하는 쪽이다. 나의 어머니는 그 둘 중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별다른 고민 없이 후자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미혼모의 딸이다. 나는 스물여덟 해를 살면서 이 사실을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 없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존재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그의 말버릇은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어.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였다. 그는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그런 말로 내게 화풀이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악의를 떨쳐낼 방어기제를 번듯이 구축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 말을 숨 쉬듯 들으니 정말로 내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끝내 열한 살쯤엔 어머니의 말을 수긍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어도, 나로 인해 그가 슬프고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나의 출생부터가 죄스러운 일인 줄만 알았다. 처음으로 불교 교리를 배운 때에, 내가 죽은 후 윤회하면 축생이나 아귀로 태어나리라 믿었을 정도였으니.


나는 다분히 철학적이고 곧잘 사색에 잠기는 조숙한 아이로 성장했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며 삶과 죽음에 대한 공상을 좋아하는 음울한 아이. 그런 내가 어머니의 속을 썩이는 말썽꾸러기였냐고 묻는다면 그것 역시 아니라고 단번에 대답할 수 있다. 단언컨대 나는 비행이란 걸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으며, 흔한 지각조차 해보지 않은 그린 듯한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교사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우등생이었고, 청소년 우울증이 발병해 모든 학업이 뒤처졌던 고등학교 시절조차도 이렇다 할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무리를 겉돌며 독서에 매진하는 학생이었을 뿐.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태도는 달라지는 게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출산한 후, 사회가 일컫는 ‘정상적’인 결혼 끝에 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내 씨 다른 남동생을 그리도 예뻐했다. 남동생에게는 방긋방긋 웃어주다가도 나를 보면 짜증을 내는 얼굴이 되곤 했다. 나는 그런 편애에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누군가 그랬던가, 외로움이란 홀로 있기에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애정을 받고 싶은 대상에게 애정을 받지 못해 생기는 감정이라고. 나는 외로웠다. 하지만 그 감정에 시달리는 것도 오래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는 어머니의 가출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빚더미를 끌어안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혼은 당연한 절차였다. 어머니에게 질린 아버지-내 아버지가 아니라 동생의 아버지였지만-는 양육권도 깔끔히 포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세 식구가 되었다.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뒤에도 어머니는 남동생을 소중히 여겼다. 가출했다가도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동생을 데리고 둘이서만 외식하고 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날로 갈수록 끔찍해졌고 나는 자연히 도태됐다. 여전히 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청소년기부터 발병했던 우울증을 별다른 치료 없이 오래도록 방치한 끝에 양극성 장애 1형, 쉽게 말해 조울증을 판정받고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4년 차다. 그런 내가, 지금은 공황증세로 방구석 폐인이 된 어머니를 보필하며 그의 빚을 갚고 있다. 미혼모의 딸, 한부모 가정의 자식, 국가장학금 1분위의 저소득층, 장녀, 정신병 질환자, 빚더미에 앉은 한 집안의 가장. 내 어깨에 내려앉은 단어들 사이에서 나는 나를 미혼모의 딸로 규정하기로 했다.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그것으로부터 태어났으니.


내가 걸음 하는 모든 공간에 어머니의 학대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걸 떼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특히 퇴근 후에 어머니와 단둘이 함께 있는 집에서는 그 낙인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어머니는 내게 재해 같았다. 존재만으로 나를 우울의 파랑으로 빠트려버리는 사람. 어머니가 어쩌다가 나에게 말을 걸면 기분이 바로 우울해졌고, 어머니와 얼굴을 맞대고 식사할 때면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따로 먹었다. 여름에도 내 방의 문을 꼭 닫은 채로 지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도, 날이 갈수록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은 커져만 갔다. 퇴근 후에 카페로, 피시방으로, 식당으로, 어디든 발걸음을 돌렸고 밤늦게 귀가했다. 집은 거의 잠만 자는 곳이 되어갔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갔다. 서로의 존재를 투명 인간처럼 취급하기에 이르렀고 아주 최소한으로 필요한 말만이 오갔다. 내가 중학생일 때처럼 말이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내 모습에서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 만다.


가출을 일삼던 어머니의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새로운 시야가 생겼다. 지금껏 나는 어머니가 나를 증오하고 싫어한다고만 여겼다. 내가 꼴 보기 싫어 가출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더 미워하고 싶지 않은 마음. 애증과 닮아있는 일말의 애정이, 삭막한 아스팔트 같은 마음에 작게 싹터 있던 것이다. 간혹 서로 시답잖은 말이나 주고받으며 웃고 떠들기도 했던 짧은 찰나들이 스쳐 갔다. 나는 그 길로 집에 달려갔다. 어머니는 내 방을 청소 중이었다. 그는 나의 이른 귀가에 놀라며, 방에 함부로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다.


나는 당장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를 끌어안지는 못했다. 그러기엔 우리는 너무 먼 길을 돌아 걸어왔다. 그래도 어떠한 말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고맙다고. 나는 그저 그 한마디를 묵묵히 건넸다. 건네고 보니 멋쩍어서, 방이 깨끗하니 보기 좋다는 말을 어색하게 덧붙인다. 어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환히 웃었다. 얼마 만에 보는 미소였는지 모른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비로소 깨닫는다. 당신이 나로 인해 행복할 수는 없어도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염원해왔던 것이라고.


언젠가 나에게 너 같은 게 있어서 불행하다고 소리를 지르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럼 나 같은 걸 낳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울면서 대꾸했던 나도 떠올린다. 우리의 사이는 그때 크게 금이 가버렸지만, 이제는 그것보다 더 커다란 금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확신이 든 날 밤, 어머니는 내게 지금껏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던 나의 아버지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어머니가 짝사랑했던 남자. 키가 훤칠하고 공부도 잘하며 성격이 좋았다던 남자. 지금은 스튜어디스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잘살고 있다는 남자. 그는 내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문득 그것이 정말로 서글퍼졌다. 처음부터 내겐 아버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아버지를 정말로 영원히 잃어버렸다. 나의 아버지에게 나의 존재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존재조차 아니었다. 처음부터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이불 대신 상념으로 나를 감쌌다. 걷잡을 수 없이 이곳저곳을 배회하던 생각이 문득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불특정 다수에게 가 닿는다. 한국 전역 곳곳에 있을 미혼모의 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긴 밤 긴 터널 속을 걸으며 눈물짓고 있진 않을까. 나는 그런 그들에게 대리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아니, 아버지가 없어도 우리는 완전하다고 알려주는 글을 쓰고 싶다. 태어난 걸 죄스럽게 여겼던 수많은 딸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원한다. 언젠가 웃으면서,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렇게 바라며 눈을 감았다.


일생을 걸어온 터널의 끝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만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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