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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an 03. 2023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야

1부, 싹트는 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울보였다. 준비물을 깜빡했다고 울고, 같은 반 아이가 놀린다고 울고, 시험 문제가 어렵다고 울고, 급식이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할 것 같다고 울고, 넘어져서 조금 까졌다고 울고, 매일같이 우는 삶이었다.

강압적이고 엄격한 훈육 환경에서 자라온 나는 내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집안 어른들은 대체로 내 의견을 무시하기 일쑤였고 간혹 옳지 않은 의견을 입에 올렸다가는 훈계를 한참 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과보호란 과보호는 잔뜩 받으며 커서, 의견 내는 법도 모르는 주제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마저 모르는 아이가 되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어떤 일이 생기면 눈물부터 터트리곤 했다. 그러면 호랑이처럼 무서운 외할머니도 잠시 분노를 거두고 내 말을 들어주곤 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단언컨대, 다분히 계획적으로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상당히 심약한 아이였기 때문에 진실로 서러워서 울곤 했다. 어쨌든 그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니, 완전히 맨몸으로 야생에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학교’라는 거대한 사회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툭 하면 우는 나와 상대하기를 곤란해했고, 선생님들도 손이 많이 가는 아이라며 성가셔하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피부로 느껴졌다.

그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두 명의 남자아이가 나를 집중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치마를 들치는 것은 기본이오, 내가 가진 물건을 함부로 뺏어가서 돌려주지 않거나, 내 교과서에 멋대로 낙서하거나, 내 물건을 망가트리기도 하고, 나를 밀어 넘어트리거나, 내 급식에 침을 뱉기도 했다. 나는 평소에 잘만 울음을 터트렸으면서도 어쩐지 그 아이들에게 궂은일을 당할 때만큼은 울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겨서, 갖은 애를 쓰며 울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울음을 오래도록 여러 번 눌러 참으면 분노가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한 순간,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당한 일들을 고자질했다. 하지만 이미 그도 내가 괴롭힘을 받는 것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는 말했다.

     

“걔네가 유정이 너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나는 그 말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집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었을 때도 어른들이 똑같이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다”라는 대답을 내놓았을 때, 나는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말 이상하게도,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라면 나 역시 좋아하는 상대를 괴롭혀도 좋다는 걸로 인식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게 인식하지는 않았다. 그저 상대가 괴롭히는 걸 이해하자는 방향으로 생각의 물꼬가 텄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좋지 않은 대답이다. 아니, ‘옳지 않다’라고 말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는 피해자의 감정을 무시한 채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헤아리기를 종용하는 말이다. 심지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를 괴롭혔을 때만 주로 저런 말들을 한다. 반대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괴롭히면 저런 말로 감싸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특히나 한국은 오래도록 그렇게 돌아갔다. 요즈음도 사람이 사람을 해한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초범이니, 심신미약이니, 음주 상태였다느니, 미래가 창창한 청년이라느니 하는 온갖 말들로 그들을 끌어안고 감싼다. 유족의 품에 끌어안고 감싸져야 할 피해자는 이미 떠나고 없는데도 어떻게 잘만 그런 말들을 지껄일 수 있는지.

세상이 피해자에게 가혹하다. 안 그래도 가혹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 두 배, 세 배의 짐을 지운다. 세대가 변한 요즘에도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야” 같은 말을 들으며 자라는 여자아이들이 있을까? 나는 문득 어느 날 그런 의문을 가졌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형용하기 어려운 슬픔과 우울감에 빠졌다. 그 감정은 무력함과도 닮아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린 채 허우적거리다가 산책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막 하교한 사촌 동생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제 초등학생이 된 사촌 동생은 씩씩하고 발랄하게 학교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학교에서 여장부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어찌나 기뻤던가. 이 사랑둥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은 모양인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기에,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우리 서현이, 잘 다녀왔어? 학교에서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었을까? 응?”

“응, 언니. 나 오늘 나 괴롭히는 애들 혼내주고 왔어.”

“서현이를 괴롭히는 애가 있었어? 누구?”

“남자애 하나 있어. 근데 선생님께 일렀더니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래.”     


나는 그 말에 표정이 일그러질 뻔한 걸 참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촌 동생의 말에 구겨진 마음마저 다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좋아하면 잘 해주고 싶어지지, 괴롭히고 싶어지지 않아요!’하고. 그랬더니 선생님이 알았대. 걔네 나한테 사과도 하고 반성문도 썼어. 나 잘했지?”     


나는 환하게 웃는 사촌 동생의 얼굴을 보고 조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염없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뭐라도 사 먹으라고 용돈을 쥐여주고 산책을 나섰다.

공기가 상쾌했다. 무거웠던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렇다, 시대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상은 여러 사람의 작은 선의로 조금씩 좋아진다’라는 말처럼,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나도 언젠가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사촌 동생의 말을 그대로 들려줘야지. 좋아하면 잘 해주고 싶어지지, 괴롭히고 싶어지지 않게 되는 법이니까 만일 누군가가 너를 괴롭힌다면 본때를 보여주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내 주변의 아이들에게 이 말들을 퍼트려 심어놓겠다. “좋아하니까 괴롭히는 거야” 따위의 말이 근절될 때까지. 그런 날이 오면, 내가 겪은 고초의 절반은 덜 겪어도 되는 세상일 거야. 그런 세상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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