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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an 11. 2024

나의 친애하는 원동력들을 위해.

2021년의 내가 남긴 글

 ‘죽고 싶었던 순간, 하루만이라도 더 살자고 결심하게 만든 일이 있었는가?’


 써야지, 당장에 써 내려야지, 생각은 각오로 변했고 각오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삶을 견디며 걸어온 모든 과정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야지’라고.


 실제로 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차도로 뛰어들까 타이밍을 재어보기도 했고,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커터 칼을 들고 내 손목을 바라본 적도 있었다. 때로는 옥상에 올라가 물끄러미 한참이나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이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 아니더라도 수도 없이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반에서 10등내에 들지 못해서, A+ 학점을 받지 못해서, 건강이 무너지고 아파서, 내가 바라지 않은 스케줄 조정으로 월급이 갑자기 삭감되어 생계가 어려워져서 같은 평범한 이유는 물론, 비가 오는데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서, 이불 빨래를 했는데 이불이 너무 무거워 빨랫줄에 제대로 널리지가 않아서, 볼펜을 떨어트린 탓에 심이 망가져 선이 뚝뚝 끊겨 나와서, 등등 정말 사소한 이유로도 죽고 싶었다.


 전자까지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상당히 사소하고 가벼운 이유다. 후자까지 말하면 대부분 “에이, 그런 이유로 뭘 죽어. 농담이지?”라고 말하곤 한다. 참 속 편한 이야기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진심으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우울증이고 병인 건데. 지금은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정도로는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진심으로 죽고 싶을 때’ 내가 어떻게 버텨서 지금까지 살아왔느냐, 하고 묻는다면 정말로 할 이야기가 많다.


 내가 죽음을 택하지 않은 건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 내가 떠나면 무너질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죽고 싶은 때마다 나를 붙잡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을 떠올리면 나는 ‘그래, 하루만이라도 더 살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커닝을 한 게 들켜서 반성문을 쓰고 부모님에게 사인을 받아오라는 담임의 지시를 받았을 때였다. 커닝을 한 건 분명 잘못이다. 여기에 구차한 변명을 보태보자면 그때 나는 모든 시험을 90점 이상 받아오지 못하면 체벌을 받았다. 회초리로 틀린 개수만큼 종아리를 맞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하필 그날 본 시험은 과학 과목이었고, 개중에서도 내가 자신 없는 물리와 관련된 분야였다. 그 당시 나는 만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기에 하루하루 습작을 그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물론 집에서 무척 반대했기 때문에 매일 도서관에 남아서 그렸다- 당연하게도 시험 하루 전에 벼락치기 하는 걸로는 시험 난이도를 이겨낼 겨를이 없었다.


 나는 체벌이 두려워 커닝을 했고, 운이 나쁘게 들켜서 일이 그렇게 흘러가버렸다.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나서는 내 모든 삶이 끝난 것 같았다. 절망감이나 두려움보다도 크나큰 무력감을 느꼈다. 가장 먼저 ‘부당함’을 느낀 것 같다.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들 무리 중에 매우 화목한 집에서 유복하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를 오랜 시간 지켜본 탓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태어나져버렸을’뿐인데, 시험 하나 잘못 봤다고 맞고, 쫓겨나는 모든 일들이 진절머리가 났다.


 집으로 가는 길, 책가방은 지독하게도 무겁게 느껴졌고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섰다. 빨간 불이었다. 차들이 쌩쌩 다니는 그 도로로 당장 뛰어들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 듯 머릿속을 스치는 일이 있었다. 활동하던 애니메이션 팬 카페에 내가 몇 월 며칠까지 마감해서 올리겠다고 약속한 그림이 있었다. 나는 내 인정욕구를 그곳에서 해결하고 있었기에, 내가 그림을 올리면 돌아올 반응을 생각하자 모든 고뇌가 씻은 듯이 나은 듯 했고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차도로 뛰어들려던 어린 나를 익명의 사람들이 구해낸 것이니 대단한 일 아닌가. 지금은 기억도 안 나지만 죽기 전에 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남기고 싶다. 그날 나는 밤새 혼나고 잠 한 숨 못 잔 채 학교에 등교했지만,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그렇게 중학생이 되기까지는 그 이유로 살았다. 끊임없이 작품을 생산하고 그 작품을 인정받는 일. 내 작품을 기다려주는 사람. 사람들의 환호. 어쩌면 나는 그것이 좋아서 지금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걸 업으로 삼으려는지도 모른다.


 그 일들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중학생 때는 완전히 컴퓨터를 금지 당했다. 어른들이 외출할 적에나 몰래 컴퓨터를 켜서 하는 게 가능했고, 나에게는 휴대폰조차 없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작품 활동이 불가했다. 내 우울은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번져나갔다. 성적은 수직 상승해 전교 10위 권 내에 들었지만 삶에 대한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고 나는 더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커터 칼을 챙겨와 욕조 앞에 앉았다. 그 당시 가장 유행했다고 해야 하나, 유행이라고 말하니 어휘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어쨌든 그러했던 자살 방법 중 하나가 커터 칼로 손목을 긋고 그 손목을 욕조 물에 넣어놓는 거였다. 그러면 과다 출혈로 죽는다느니, 그런 말이 있었다. 지금도 그게 정말인지는 모른다. 지금은 그럴 생각도 잘 안 들고.


 그렇게 죽을 준비를 다 하고 나니-유서도 한 장 안 썼다. 유서를 쓰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윽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임유정 님! 등기 왔습니다!” 우체부의 외침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펜팔을 하고 있었지.’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즈음 나는 초등학생 때 애니메이션 팬 카페에서 만난 좋은 인연과 펜팔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여섯 살 연상인 언니였는데, 펜팔에는 애니메이션 얘기가 아닌 서로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만을 죽 늘여놓았다. 나는 가장 최근 편지에 더 이상 삶이 재미가 없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찌해야 하냐는, 한탄에 가까운 말을 적어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답을 바란 적은 없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는 모든 걸 때려치우고 등기를 받으러 갔다.


 정말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기에도 이 일은 과하게 드라마틱하지 않나 여긴다. 하지만 꾸밈없는 진실이다. 등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열쇠고리가 같이 담겨 있었고 긴 장문의 편지가 도톰하게 들어있었다. 내용은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이었다. 아니, 해답이라기보다 그 사람의 간절한 만류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은 이상 그 사람의 생명이 온전하게 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의 생명은 오로지 스스로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지 않을까. 또한 나 역시 살아가면서 남의 생명을 조금씩 손에 쥐고 살아가는 것이니 우리는 쉬이 죽어서는 안 된다. 죽음을 고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거고 힘든 사정이 있다는 걸 알지만 조금만 더 고민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들이 총 다섯 장의 편지에 빼곡하게 풀어 적혀 있었다. 나는 편지를 읽고 소리 내서 엉엉 울었다. 이 편지는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이끌어줬다.


 성인이 된 후에 또 언젠가 건강이 무너진 이유로 죽고 싶었을 때는 옥상 위에 올라갔다. 그때 나는 주변 풍경을 한 번 빙 둘러봤다. 마지막으로 보는 경치를 머릿속에 새겨두면 떨어졌을 때의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뭐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였다. 그러다가 저 멀리쯤에, 거의 소꿉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십 년 지기 단짝이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때는 12월이었다. 나는 문득 12월 말에 단짝의 생일이 있는 걸 떠올렸다. 같이 애슐리에 가서 멋들어진 식사를 하자며 웃는 그 얼굴 역시 눈앞에 선했다. 엄마와 대판 싸우고 구질구질해져버렸던 내 생일의 기억도 떠올랐다. 내가 울면서 전화를 하자 단짝이 나를 데리고 PC방에 가서 먹을 것도 사주고 게임도 같이 해줬던 것. 나는 그렇게 다시 죽음을 물렀다. 이 일은 지금까지 나를 견디게 하고 있다.


 이 모든 이유로 나는 모 작품에서 나온 구절, “나는 평생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았지 나 자신의 능력과 수고로 살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안다. 갚아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를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나 역시도 누군가의 덕분으로 살아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나의 삶을 적을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겨내고, 버텨서, 언젠가는 이 암울하고 어두운 터널 끝에 찬란한 빛이 있으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견뎌나가며.


 나의 친애하는 원동력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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