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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an 01. 2024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 추억

새해에도 출근하며 남기는 글

 고요한 새벽녘 지하철. 1월 1일 휴일 꼭두새벽의 2호선은 저마다의 사연이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간혹 앉을 자리조차 없는 평일 오전 여섯 시 반의 2호선과 다르게 한적하기 그지없는 광경. 나는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맨 끝자리에 앉아 안전봉에 고개를 기대고 부족한 잠을 채웠다.


 그런데 유독 지하철 안내 방송 소리가 시끄러웠다. 원래도 작은 소음에 잘 깨는지라 집에서도 항상 귀마개를 하고 자던 나는, 버즈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도 누그러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 방송 소리에 눈을 떴다. 무슨 시스템 오류인지는 몰라도, 종종 이렇게 귀가 째질 정도로 방송 음량이 크게 나오는 지하철 차량이 있다. 2주일에 한 번꼴로 그런 차량에 타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감내하기 힘들었다. 나는 결국 선잠을 포기하고 오디오 북을 듣기로 했다.


 오디오 북 음량을 꽤 높였는데도 방송 소리는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내 옆자리에서 졸고 있던 승객도 큰 음량에 미간을 좁히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마침 내릴 역이었던 모양인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릴 문을 찾아 헤맸다. 내릴 문은 오른쪽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선 방향에서 어느 쪽이 오른쪽인지 몰라 한참 두리번거린 끝에, 차창 밖으로 승강장이 보이고 나서야 방향을 찾았다. 나는 문득 그 모습에서 나의 어릴 적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으로 외할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탔을 때였다. 나는 앞뒤가 똑같을 뿐 아니라 양쪽 문의 생김새마저 같은 지하철 안에서 어느 쪽이 오른쪽이며 왼쪽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만 문을 찾아서 내리더라. 나는 그것이 통 신기하여 외할머니에게 질문했다.     


 “할머니, 내릴 문이 오른쪽이라는데 그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어요?”

 “으응, 그건 말이지. 유정아. 바람을 느껴보면 돼.”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며 어린 나를 지하철 중앙 복도에 서게 했다. 그리고 지하철이 달리고 있는 앞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하철이 이쪽을 향해 달리고 있지? 유정이 네가 지하철이 됐다고 생각해 보렴. 바람을 등지고 선 쪽이 아니라 바람을 맞는 쪽으로 서는 거야. 바람이 네 얼굴을 간지럽히는 쪽으로.”     


 나는 외할머니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외할머니의 말씀대로 나는 내가 지하철이 됐다고 머릿속으로 가정했다. 그 후 바람이 나의 뺨을 스치고, 때로는 세차게 때리고 지나가는 쪽을 향해 섰다. 바람과 마주하는 방향.     


 “옳지. 그러면 이게 기준이 되는 거란다. 이제 유정이가 선 기준으로 오른손이 있는 쪽이 오른쪽 문, 왼손이 있는 쪽이 왼쪽 문이야. 이해할 수 있지?”

 “네!”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과연, 외할머니의 설명은 이해하기 쉬웠고 재미있었다. 나는 우리가 내릴 역의 문을 제대로 찾아 하차했다.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앞뒤로 신나게 흔들며 동대문 시장으로 향하던 그때.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나는 아직 머리가 검을 적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지금과 달리 젊고 당당하고 창창했던 외할머니. 나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나이가 폭 들어버린 순간을 기억한다. 당신 노후대책 한다고 모아둔 돈과 집을 팔아 당신 남편과 당신 딸의 빚으로 탕진한 후로 유독 작아지셨던 그때를. 문득 코끝이 찡해지고 만다. 외할머니와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긴 대화를 나눠본 지가 참으로 오래됨을 깨닫는다.


 외할머니는 기억하실까? 잊으셨을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외할머니는, 잊기 싫어도 잊어버리게 되는 병에 걸리실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처럼. 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그렇게 어둡고 추운 새벽 출근길에서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올해의 첫 결심을 했다.     


 외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전에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를 많이 되새겨 주자.

 외할머니와 많은 것을 추억하자. 우리가 행복했던 시간에 대해 회상하며 웃고 떠들고 사랑하자.     


 사람의 인생은 원래 늘 행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지루하고 따분하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 대부분이다. 단지 우리는 잠시간, 조금씩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기고 곱씹으며 살아간다. 그 기억이 사람을 만든다. 그 기억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나는 오늘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기억을 찾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소중한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다.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 추억이 있나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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