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형이 없다. 그래서인지 '형'이라는 단어가 내겐 무척 어색하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형'과 '언니'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우선 호칭 정리부터 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지 잠시 '간'을 보다가, 어느 정도 친밀감이 필요하다고 판단이서면 바로 '형, 언니, 동생' 등의 서열을 정하고 관계를 시작한다.
여성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고 본다. 특히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다른 호칭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빠른 서열 정리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서로를 불러주게 되고 그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나, 남자들은 직책에 따른 호칭을 주로 사용한다. 김대리, 박차장, 서부장, 최사장 등 서로의 직책에 맞는 호칭을 불러주면 된다. 그래서 남자에게는 '명함'이 그렇게 중요한가 보다. 하지만 직책을 잘 모르겠거나, 혼동될 때는 정말 곤란하다. 직책을 빼고서는 딱히 상대방을 부르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씨는 어느 누구에게 사용해도 예의가 없어 보이며 (심지어 딱 봐도 어린 사람에게도), ~선생님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나는 영미권의 Mr.라는 호칭이 참 좋다.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미스터가 바로 마스터 호칭인 듯싶다. 하지만 여기도 단점은 있다. 그 사람의 직책대신 이름을 외워야 된다는 사실.
안타깝게도 난 사람들의 이름을 잘 못 외운다. 높은 직위에 올라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타인의 이름을 잘 외우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나는 이미 글렀는가 보다. 상대방의 이름을 외우고 불러준다는 것은 상당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처음 본 사람의 이름을 바로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훗날 다시 만났을 때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보통의 정성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상대의 명함에 빼곡히 그의 특성, 그와 나눈 대화 등을 기록해 둔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런 노력이 성공의 열쇠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못하고 있다.
미스터 말고 또 하나의 훌륭한 호칭은 바로 'Sir'이다. 외국에서는 통상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제공받는 사람에게 부르는 호칭이다. 한국 사람의 특성상 누군가에게 'Sir'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Sir'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상대방 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싫어서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Sir'라는 단어에는 마법 같은 매력이 있다. 같이 일했던 Canadian 중 David라고 있었다. 오십이 넘는 이웃집 아저씨 스타일이었는데, 타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말 본받을 만했다. 우선, 누구에게나 매우 친절하다. 더군다나, 그는 '완전 웃상'이었는데, 온몸에 매너가 철철 넘쳐났다. 친절한 말투, 상대에 대한 배려,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여유와 재치... 특히 그가 타인을 부를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는 잘 모르는 모든 이에게 Sir라고 불렀다. 보안 요원이든, 현장의 작업자든, 청소부든, 매점의 점원이든... 그에게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무조건 'Sir'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번 해보시라... 입이 안 떨어진다. 나도 노력은 해봤다. 하지만 'Sir'라는 단어가 입에 맴돌 뿐, 입밖에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Sir'라고 상대를 부르는 순간, 내가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 싫어서겠지.
하지만 나는 수없이 많이 그의 마법을 보았다. 그에게 Sir라고 불림을 받은 동남아 노동자, 점원, 보안요원 등은 매우 감개무량해하는 것 같았다. 당시 그는 동남아 건설 노동자들의 안전 의식을 바꾸는 업무를 주로 맡았는데, 그가 Sir라고 불러준 사람들은 우선 그의 말에 매우 집중한다. 자신을 높여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안전교육 효과는 매우 뛰어났다. 뿐만 아니라, 식당 점원, 보안요원들도 그에게는 눈에 띄게 친절했다.
더군다나 그는 사람들 이름을 잘 외우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수시로 바뀌는 보안지역 담당자들의 이름을 외우려고 노력한다. 항상 'Sir, How are you? I am David, What's your name?으로 small talk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바로, Mr.~, How are you?라고 인사해 준다.
우리를 반성해 본다. 본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울 생각이나 하겠는가! 저기요~, Excuse me~, 잠시만요~ 등으로 부르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이~, Hey~, Driver~... 딱 내가 불려도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은 호칭을 우리는 너무 쉽게 쓰고 있다. 상대에 대한 아무런 배려도 없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가 생각난다. 관계에 있어 이름이 이렇게 중요한데, 나는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건 또 다른 문제지만,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인들 중 친한 부류의 사람들 조차도, '형'이라고 부르는 게 어렵다. 사실 나는 직장 동료와의 술자리에서 '자 앞으로 우리 형 동생으로 지내자'라는 말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 그게 불편하다. 난 누가 봐도 외항적이며, 여러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지만, 누군가와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게 마음 편하다.
내가 문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