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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Oct 16. 2023

공허함 채우기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역할

 20대 초반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한창고민이 많았다. 사실 지금도 같은 고민을 하지만 그때는 나를 지켜보던 이들까지 나서서 내 앞날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어머니가 수년째 병상에 누워계셨고 깨어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의사의 선고가 있었지만 나는 기적을 꿈꾸었다. 친지들 모두 당연히 내가 휴학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젊은 내가 가족도 없이 전적으로 간병을 하다 보면 장래가 불투명해진다며 휴학을 말린 언니의 조언과 지원 덕에 성적은 엉망이지만 학교에 다녔다. 졸업을 앞둔 무렵부터 어머니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졌고 구급차를 택시 부르듯 불러 타고 병원에 가곤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보호자인 내게 이번에는 정말 각오를 하라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순간들을 어머니는 이겨냈고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하면 퇴원을 했다. 초겨울 어느 날 구급차로 병원에 달려가 다시 입원을 하고 위기를 면하며 한시름 놓았을 때 신경외과 레지던트 치프가 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그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네며 여동생이 나와 동갑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는 생소했던 연명 치료를 언급하며 이렇게 생명을 유지를 위한 치료가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고통을 안길 뿐이라며 이제 어머니가 편히 떠나시도록 하는 게 오히려 좋을지 모른다며 치료중단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어머니에게 매여 지내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놓칠 수 있다며 직업을 구하던 대학원을 진학하던 내 인생을 살기를 어머니도 바라실 거라고 했다. 나는 눈물이 쏟아져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그의 조언대로 어머니 담당 주치의를 찾아가 상담을 했다. 주치의는 단도직입적으로 병원비 마련이 어려운지, 간병 생활에 지쳤는지 물었다. 이대로 퇴원하면 돌아가신다고  이제 어머니가 떠나길 바라냐고 물었다. 나는 펄쩍 뛰며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솔직하게 경제적으로 점점 언니에게 의존하여 불안감이 있지만 그보다 어머니의 생명연장 치료가 고통의 가중이라는 소리를 들었 혼란스럽다고 했다. 주치의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고통스러워도 딸을 위해서 버티시는 겁니다. 아직 이십 대 중반도 안된 어린 딸 혼자 남겨 놓으면 세상살이가 힘들다는 걸 잘 아시니까, 딸이 혼자서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어머니도 버티시는 겁니다. 혼수상태라도 살아계시는 것과 안 계신 차이는 엄청나요. 세상물정 모르는 스무 살이 갓 넘은 여자가 부모 없이 혼자라는 사실은 세상사람들이 함부로 대할 명분이 되는 게 현실이니...”

 주치의의 말에 나는 다시 울어버렸다. 몸만 자랐지 너무 어리석게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며 어머니의 자리를 그새 비워버린 내가 부끄러웠다. 혼수상태로 어머니의 역할이 사라지자 “내 인생은 나의 것”인데 간섭하지 말라고 외치던 때와 달리 그 공백이 가져온 허전함과 막막함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불안 속에 시달리던 나를 채우던 의사의 말. 그것은 어쩌면 혼수상태의 어머니가 의사를 통해 내게 전달하고 싶던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네가 홀로 설 때, 나도 속 편히 가고 싶다.’라는 의미처럼 들렸다. 혹자는 그것은 의사의 생명을 중시하는 윤리 의식의 발동이었고 의무이행이었을 뿐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자리가 다시 인식되며 여전히 부모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 중이라 느꼈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의 삶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리고 내가 그때 겪은 이 사건은 내 기억 속에 이야기가 되어, 내가 암투병하며 삶이 공허할 때마다 떠오르며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보면 나의 서사 천착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친구도 없는 낯선 동네를 배회하는 대신 글보다 그림이 많았던 동화와 언니의 책장을 뒤지며 재미와 묘한 희열을 느끼던 그때 시작 되었다. “성냥팔이 소녀” 대신하여 소녀의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욕하고,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를 대신해 왕자에게 칼을 들이대는 상상을 하면 즐겁고 유쾌했다. 그리고 좀 더 커서 헤르만 헷세의 소설들 속 남자 주인공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고,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으며 둘째 이반의 이성적인 모습에 홀딱 빠져 남자친구 없는 공허함을 채웠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세헤라자드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이야기하기’를 시전 했듯 몸이 아프고 사회적 성공과 멀어진 나 자신이 실패한 인생이라 좌절의 늪에 빠져 공허한 허우적거림 대신 내 삶의 의미를 주고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소설 쓰기룰 시전하고 잇다.


 서사(narrative)는, 남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펼쳐든 소설이든, 대화 상대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 드라마를 보며 적적함을 달래든, 학교 과제로 억지로 책을 읽든 혹은 지하철에서 젊은 하급 직원이 상사를 욕하는 이야기를 옆자리에서  엿듣던, 우리 삶의 빈틈을 채운다. 그 이야기들에 공감을 하고 비판을 하기도 하며 화자이며 청자인 우리의 생각을 정립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이야기를 욕망하는 이유와 역할을 찾을 수 있다. 의미 생성! 상상이던 사실이던 이야기는 만들고 전달되는 행위, 즉 소통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불안해하고 공허하고  심지어는 삶을 허무해하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가 이야기를 듣거나 서사문학을 접하면 우리는 헛되어 시간을 견딘다는 허무함이나 불안대신 뿌듯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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